매일신문

계산 포럼-정치의 격

최근 택시를 탔다. 운전사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선거는 우리의 지도자를 뽑는 잔치 아닙니까. 그러니 당연히 국민들은 신바람을 내며 찍으러 가야 합니다. 그런데 당최 찍고 싶은 사람이 없어요. 그저 하는 수 없어 찍으러 갑니다. 잔치가 아닙니다"고. 정말 정곡을 찌른 말이다.

축제이어야 할 선거판이 개판이 다. 왜그럴까. 그것은 한마디로 '이기고 보자'는 승리지상주의 때문이다. 경쟁만이가치이고 승리만이 덕목인 판에 무슨 격(格)이나 여유, 낭만 따위가 끼어 들 것인가. 폭로, 인신공격, 마타도어, 공작, 권모술수, 인기영합 등만이 선거전에서 춤추고 있다. 이러니 정치는 격이 낮아지고 국민들은 더욱 외면하는것 아니겠는가.

옛부터 조조에게 쫓기면서도 백성을 버리지 않고 기본을 지키는, 원칙주의자 유비도 있다. 눈금을 속인 양곡배급을 칭찬했다가 부하들이 들고일어나자 그 책임을 양곡관리 장군(王垢)에게 미루는 기회주의자 조조도 있었다. 요즘 우리 정치계는 아무리 둘러봐도조조 같은 정치인뿐인 것 같다. 의리도 소신도 없고 오직 기회와 이기(利己)만 있다.

우선 철새와 해바라기가 너무 많다. 오죽했으면 돌쇄 한사람 등장하자 그토록 관심을 보일까. 그것도 때묻은 돌쇄를 두고. 이것이 정치의 격을 떨어뜨린 제1 요인이다.

그저 인기는 무상한 것이다.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한다.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는 일 아닌가. 그런데도 노무현 후보 인기가 떨어지자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후보 단일화론''노무현 불가론'을 내세우며 집단탈당을 하고 있다. 예단할수야 없지만 정치적 색깔이 너무 달라 단일화가 어려운 후보들이다. 게다가 노 후보는 국민적 정치혁명이라고 극찬을 받았던 국민경선을 통해 선출된 후보가 아닌가. 노후보의 인기가 오르면 그땐 또 우르르 몰려올 것인가. 천민 민주주의를 보는 것 같다.

이런 판에 의인(義人)은 또 무슨 소린가. 의(義)사라진 땅에서 의인이 많다는 자체가 공작의 냄새를 풍기는 일이다. 전과 7범이병역비리 의혹을 고발했다고 의인이란다. 또 민주당을 탈당하고 모 신당을 찾으면 의거(義擧)란다. 곧 이 의거에 참여하는 의인이 양산될 판이다. 이 무슨 해괴망칙 한 주장들인가. 제출한 테이프가 가짜로 밝혀져도, 국민경선을 극찬했다가 이제 와서 헌신짝처럼 버려도 의인인가. 아무래도 의인(義人)이 아니라 '사람 같다'는 뜻의 의인(擬人)인 것 같다.

게다가 다양화 시대가 겪는 가치의 혼란도 정치의 격을 낮추는데 한 몫 하고 있다. 가령 북핵문제에서 진보쪽은 동포애가 우선을 두고, 보수쪽은 당장의 안보에 우선을 둔다. 문제는 자기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온갖 궤변에다 거짓말은 물론 공작도 불사한다는데 있다. 권모술수가 너무 난무한다. 그리고 옳고 그름이 뚜렷한 사건이 터져도 당사자는 끝까지 부정하고, 또 사정당국은 외면하는 바람에 진실이 무엇인지를 국민은 모른다. 도대체 옳고 그름이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짜증나는 일이다.

정보화라는 시대 흐름 때문일까. 세상은 전체주의에서 개인주의로, 관(官)에서 민(民)으로 권력이 이양되었다. 그래서 인지 세계적으로도 정치는 상당히 희화화되고 있다. 영웅주의는 가고 시민주의시대가 온 것이다. 개그 작가 장덕균씨에 의해 우리도 벌써 풍자화 되었다. 이회창후보는 '대쪽이냐 개쪽이냐', 정몽준후보는 '용꿈이냐 개꿈이냐', 노무현후보는 '노풍이냐 허풍이냐'라는 책으로. 문제는 작가의 풍자는 좋으나 후보들이 작가가 풍자한 수준의 소인으로 전락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분위기 탓일까. 그렇게 보인다는 사람이 많다.

중국 춘추전국시대는 약 500년 간 싸움만 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앞선 춘추시대와 그 후인 전국시대는 그 전쟁의 질이 근본적으로다르다고 한다. 청나라 대학자 고염무의 분류 중 하나만 봐도 그렇다. 춘추시대는 전쟁에도 예(禮)를 숭상하고 신(信)을 중히 여겼으나 전국시대에는 그러한 멋이 없었다.

자유당시절 '사쿠라' 소리를 들을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조병옥 야당 대표는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울 수야 없지 않은가"며 대치정국을 푸는 결단을 내린다. 우리 정치의 춘추시대인 셈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기범이든 마약사범이든 가리지 않고 표 깨는 데 도움만 되면 동원하는 요즘이다. 바로 전국시대인 셈이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고 봐야하는 막가파 정치시대인 것이다.

정치가 각박해 지면서, 여유와 멋이 사라진 것이다.경제에 윤리가 사라지면 천민 자본주의가 되듯이 정치에 윤리가 사라지면 천민 민주주의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래서는 안 된다. 현재로서는 사치스런 말이 될는지 몰라도 정치의 격을 높이자는 목표만은 가지자. 그래서 우리도 영국 노동당의 구호 '멋진 영국'(Cool Britannia)처럼 멋 좀 부리는 정치를 해보자.

서상호(본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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