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루사가 한반도를 할퀴고 간지 두 달 보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루사는 이미 과거형이 됐다. 그러나 경북 김천시 봉산면 상금 2리에 루사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상금 2리는 김천시 지례, 대덕, 증산, 황금동과 더불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지역이다.
도심 도로에서 빠져나와 마을로 들어가는 10여 리 길, 비포장 길 오른 편으로 모래밭이 펼쳐진다. 앙상하게 마른 포도나무들의 을씨년스런 모습이 거기가 풍성했던 포도밭이었음을 짐작케 해주고 수해의 아픔을 침묵으로 웅변하고 있었다. 키 작은 채소가 자라던 밭은 밀려온 모래에 덮여 작은 사막이 됐다.
상금 2리 마을 초입의 공터에 선 수재민의 임시가옥인 '컨테이너 집', 한 개당 5.4평 넓이의 컨테이너 10여 채가 ㄷ 자 모양으로 모여 있다. 겨울을 재촉하는듯 몰아치는 찬바람이 대형 금속박스 벽면으로, 지붕 위로 마구 부딪친다. 초가집을 휘감는 한겨울 혹독한 바람보다 훨씬 날카롭고 살벌하다.
권병규 할머니의 컨테이너 집, 70, 80세가 넘은 할머니 7,8명이 모여 작은 잔치판을 벌이고 있다. 할머니들은 작은 밥상에 고기와 떡을 올려놓고 정담을 나눈다. 소주와 음료수 병도 보인다. 예기치않은 손님이라도 찾아오면 떡과 고기를 담은 새 접시를 내놓으며 함께 어울리기를 권한다. 할머니들의 얼굴엔 수해의 아픔은 이미 모두 삼킨듯 눈물대신 미소가 배어있다. 마을은 황량하지만 마음은 따뜻한 농심을 잃지 않고 있었다.
컨테이너 집 생활 두 달 남짓, 전기보온 패널이 깔린 바닥은 따뜻하지만 외풍이 심해 공기는 써늘하다. 바닥이라도 뜨끈하게 하자니 전기료가 만만치 않다. 50% 할인된 기본료가 월 1만 2천원이다. 주거용 전기의 월 기본료 3천, 4천원에 비하면 엄청나게 비싼 셈이다. 이 작은 컨테이너 집의 한 달 전기료가 평균 4만원이다. 임시전력이기 때문이다.
급하게 내부를 치장한 컨테이너 집에는 아직 못마땅한 냄새가 배어 있다. 공동화장실, 공동 세면장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닥쳐올 한파를 생각하면 서글프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할머니들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 또 한 집(이영의 할머니 집)을 상량(上樑)했기 때문이다. 태풍에 무너진 이 마을 12채 중 9채를 상량 했다. 한 집은 수리해서 쓰기로 했으니 이제 2채 남은 셈이다. 할머니들은 음식을 권하며 연방 상량, 상량이라고 외친다. 태풍, 수해, 물난리라는 낱말에 응어리진 가슴을 풀려는 주문처럼 들린다.
마을 안쪽, 새 집을 건설하는 삽질이 한창이다. 전문 건축업자들과 이 마을 주민들이 섞여있다. 기술자들을 보조하거나 몸으로 하는 허드렛일은 모두 주민들의 몫. 다행히 이 마을은 지난 태풍 때 인명피해가 없었다. 폭우가 낮에 쏟아졌기 때문이다. 밤에 자다가 당했다면 모두 죽었을 것이라고 주민들은 말한다.
상금 2리에 40세 이상 55세 이하 남자는 15명 안팎. 특별한 일이 없는 날엔 남자 주민들 모두 집짓기에 나선다. 네 집 내 집이 따로 없다. 추위가 닥치기 전에 집을 짓자는 소망으로 뭉친 것이다. 태풍이 지나가고 20여일 만에 측량을 시작했고 곧바로 집짓기에 착수했다.
"주저앉아서 눈물만 흘린다고 무너진 집이 저절로 섭니까. 논밭이야 내년부터 어찌 해보더라도 집은 당장 지어야지요". 이 마을 유제승 이장(49)의 말이다. 다른 도시에 비해 간편한 절차로 건축비를 지원한 김천시의 공도 빼놓을 수 없다.
집들은 대부분 1m 이상 바닥을 돋우고 그 위에 신축중이다. 루사처럼 못된 태풍이 다시없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삐뚤삐뚤하던 집터도 반듯하게 측량해 공간 이용률을 높였다. 조금 좁다 싶은 골목은 넓혔다.
오락가락하던 비가 심상치 않게 퍼붓기 시작한다. 초겨울 비답지 않게 굵은 빗방울이다. 전문업자들은 하나둘 짐을 챙겨 철수. 집 신축이 예상보다 늦어지는 것은 최근 잦은 비 때문이다. 빗방울 속에서도 주민들의 삽질은 멈추지 않는다. 돈벌이로 짓는 집이 아니라 자신이 겨울을 날 집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둔 덕분에 12월 안에 6, 7집은 입주가 가능할 전망이다.
사상 유례가 드문 태풍 루사가 집을 쓸어갔고 논밭을 사막으로 만든 지 두 달 보름. 차갑고 마른 사막에 새로운 생명의 싹이 자라고 있었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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