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안동식혜 포식하던 날

한 달만 있으면 춘천에 터를 잡고 산 지가 만으로 10년이다. 아니라고 아무리 발뺌을 해도 강원도사람 다 됐다. 덕분에 고향사람들과는 격조할 대로 격조해졌고, 차 막힌다는 핑계로 큰명절 두 번의 한 번은 고향 나들이도 빼먹고 사는 형편이 되었다.

좀처럼 고쳐지기 힘들다는 투박한 경상도 말씨조차 많이도 뭉개져서 이제는 고향이 경상도라고 하면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도 더러 있을 정도다. 처음엔 그렇게 적응하기 힘들던 순 강원도식 먹을거리에도 웬만큼은 적응이 되었다.

떡만 골라먹다가 눈치께나 받았던 만둣국 대접도 이즘엔 시원하게 비워낸다. 어슷 쓴 무에 고춧가루 벌겋게 탄 '고향표' 소고기국 대신 배추잎 둥둥 뜬 '타향표' 멀건 소고기국도 마다 않고 먹어치우고, 처음엔 네맛도 내맛도 아니었던 감자떡도 이젠 제법 그 진미를 음미할 정도가 되었다.

막국수는 열흘 내리닫이로 먹어도 물리질 않고, 기름 지글거리는 닭갈비도 느끼하기보다는 구수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쯤 되면 입맛이 변할 만도 한데 그렇지가 않다. 변하기가 힘든 게 천성이라지만 입맛도 천성인지 좀체로 변하지가 않는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 30년에 접어드는 내가 아직도 겨울철만 되면 까마득한 옛날에나 맛보았던 '콤콤한' 콩잎장아찌와 과메기, '고래만한' 멸치가 덥석덥석 씹히는 젓갈 팍팍 넣은 김장김치 생각에 침을 꼴깍꼴깍 삼키는 걸 보면 확실히 그런 것 같다.

얼마 전에 나는 이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한 바 있다중부지방에 첫눈이 내리던 날 나는 안동의 하회마을에 있었다. 모두 다섯 명이었던 일행 중에 경상도 출신은 나 하나였고 나머지는 모두 강원도 토박이였다. 점심때쯤 마을 입구에 도착한 우리는 탈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서 인근 식당엘 들렀다.

간판에 적힌 '헛제사밥'이라는 게 우리들의 발길을 잡아끌었던 것이다. 일행 중 몇몇은 헛제사밥에 대한 제법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 헛제사밥을 맛깔스럽게 소개하는 '고향소식'류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막상 메뉴판을 펼쳐놓자 우리는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헛제사밥만 달랑 먹고 가기에는 먹을 만하다 싶은 게 여럿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동에 왔으니 안동찜닭을 먹지 않고 가면 반드시 후회할 거다, 배추전이 값도 싸고 먹음직해 보인다, 콩두부가 맛깔스러워 보인다, 상어산적이란 게 먹어볼 만한 거 같다 등등 의견이 분분했다.

그걸 다 먹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메뉴판을 펼칠 때 이미 내 시선을 강렬하게 잡아끈 것이 있었던 것이다. 불그레한 국물에 나박썰기 한 자잘한 무가 송송 뜬, 안동식혜였다.

나는 침을 꿀꺽 한번 삼키고는 설득작전에 나섰다. 사실 안동찜닭은 춘천에 가도 먹을 수가 있거든. 요즘은 아무데나 다 있는 게 안동찜닭이야. 막국수니 닭갈비니 하는 게 어디 춘천에만 있던가. 그리고 배추전이니 콩두부라고 해봐야 그게 뭐 딴 맛이겠어? 배추맛에 두부맛이지. 상어산적, 이건 아무래도 정체불명이야. 그런데 이 안동식혜란 건 말이야….

사람들의 미심쩍은 시선이 날아왔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욱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내 의식은 이미 어릴 적 구들장 아랫목에서 담요를 뒤집어쓴 채 알싸하게 익어가던 식혜 항아리에 완전히 점령당한 상태였다.

결국 내 설득은 먹혀들었고 일행들 앞으로 안동식혜 한 사발씩이 놓여졌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식혜 사발을 말끔하게 비워낸 뒤였다. 웬일인지 다른 네 명의 식혜 그릇은 처음 그대로였다.

입만 살짝 대고만 거였다. 아니, 왜 그래들…? 인상을 잔뜩 구기고 있던 네 명의 강원도 토박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슬그머니 식혜 사발을 내 앞으로 들이밀었고, 덕분에 나는 그 날 먹은 안동찜닭 맛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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