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넘으면 나의 더듬이는/ 숨죽인 먼지까지도 감지한다/ 먼 곳에서 잠든 그대 숨결도 수신한다/…/ 빈틈없이 다가서는 어둠과 어둠뒤에 멈칫 돌아눕는/ 비어서 쓸쓸한 마음 하나/ 낭패한 표정으로 끌어안는다/ 나의 더듬이 끝에서 비로소 불 밝히는, 그대/ 아, 비어서 빛나는/ 마음 하나'(빈마음 하나).
이구락(53·대륜고 교사) 시인은 올 겨울들어 16년만에 두번째 시집 '그 해 가을'을 출간했다. 시인의 시작 스타일이 이처럼 과작(寡作)인 것은'혹독한 가을앓이'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신재기씨의 말대로 시인의 가을앓이는 한해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생을 관류하는 하나의 아픔인 듯하다. 심연에서 솟아난 허무와 고독이 아픔으로 다가왔다가 한층 더 성숙된 자각으로 이어진다. 시적 내면풍경이 그만큼 원숙하다.
다작의 상투성이나 감성적인 아마추어리즘에 휩쓸리지 않다보니 시도 사막의 선인장처럼 드문드문 피워 올린다. 평생 시집을 3권만 내기로 작정했다는 시인의 절제된 음성에서도 그의 시가 얼마나 오래 삭혀서 나오는지 드러난다.
시작노트에 오랫동안 담아두고 정제한 작품을 비록 지면에 발표했더라도 시집으로 묶으면서다시 다듬는다.
이 시인은 강을 자주 찾는다. 강으로 가면서 일상 속에 맺혀있던 오만한 마음을 풀고,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길을 보며 겸허함을 배운다. 자아성찰.거기서 빈마음을 배운다.
시인이 시나브로 강으로 향하는 것은 평생 취미로 삼은 수석(壽石)과도 무관하지 않다. 거칠던 형상이 물결따라 둥글어지고 내면에 지니고 있던 고운 무늬까지 드러내는 돌이야말로 자신의 시적 삶을 반영하는 거울인 것이다.
"비워야 얻을 수 있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그래서 오랜 방황이 뒤따른다. 저녁놀 붉은 산기슭을 떠돌고, 눈시린 계곡과 돌밭을 서성대기 일쑤이다.1986년 나온 첫번째 시집 '서쪽 마을의 불빛' 이후 오랜 침묵을 깨고 나온 이번 시집도 그같은 길고도 깊은 가을앓이의 결정체이다. 이 시집으로 시인은 올해의대구시인협회상을 받았다.
까닭없는 아픔을 빈 마음으로 치유하고자 하는 시인의 자각은 불교적인 정서와도 상통한다. 아픔과 슬픔까지 사랑해야 하는 이 시적 자아를 시인은'그리움'으로 표현한다 .
그리움 때문에 다시 강을 찾는 것이다. 1979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한후 7년만에 낸 첫번째 시집에서도 원숙한 서정성을 평가받았으나, 시인은 스스로 패기가 부족하다는 진단을 내리고는 1년간 절필을 한적도 있다.
한때는 '형상'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이진흥·구석본·문인수·박재열 등 문우들과의 어울림도 적잖았으나, 문단 출입도 자제하면서 시에 대한 불만감을 떨치고 작품 세계를 바꾸기 위한 노력을 했다.
이 시인은 "지금까지의 시가 노정(路程)의 감정이라면, 이제는 강과 자연에 이르러서 얻은 느낌을 시로 표현하고 싶다"고 한다. 5, 6년 뒤에 그렇게 한권의 시집을 내면서 서정시는 끝낼 요량이다. 그리고는 역사적인 소재를 발굴해 작품 한편으로 시집 한권을 채울만한 서사시를 써봤으면 하는 욕심이다.
"요즘 문학의 설자리가 좁아졌습니다. 순수문학이 외면당하는 시대이지만 대중과의 야합은 하지 않겠습니다". 먼 강가에, 혹은 빈 들판 끝에 홀로버려진 희망을 찾아 시인의 긴 가을앓이가 또 시작되려나 보다. "이제는 시가 내 삶에 선행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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