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고령군 고령읍 연조리. 대가야 궁성터가 있는 고령향교를 비껴 주산(321m)으로 올랐다.
소나무 숲 사이로 다람쥐 한 마리가 냅다 달렸다.
돌과 흙을 나르던 옛 대가야인들의 피와 땀이 서린 곳이었다.
새들의 노랫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을 터. 중턱에 올라서자 물 마른 계곡을 둘러싼 돌벽이 천년 풍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꼿꼿이 남아 있었다.
대가야 도읍지와 왕궁을 지키던 산성이었다
주산의 9부 능선을 테로 두른 내성(內城)과 6부 능선을 따라 계곡을 감싼 외성(外城)으로 2중 방어벽을 구축했다.
지난 1986년 국립대구박물관의 지표조사에선 주산성 건물터 주변에서 500년대 대가야 원통모양 그릇받침과 목 긴 항아리, 사발모양 그릇받침 등이 나왔다.
이 산성은 대가야를 거쳐 통일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계속 그 '방어'의 역할을 감당해왔다.
여기서 나온 통일신라 기와 조각, 고려 토기, 조선 자기 등이 이를 뒷받침했다.
300년대 고령군 개진면 일대에서 주산 아래 구릉지로 국읍을 옮긴 대가야의 전신, '반로국(半路國)'. 동쪽 앞으로 회천과 들판이 펼쳐지고 그 너머에 금산(망산 286m)이 마주보고 있는 곳. 서쪽 뒤편에는 주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전쟁 등에 대비하기엔 천혜의 요새였다.
경남 합천군 야로면 일대로 영역을 넓히고, 토기를 만들고, 철을 교역하면서 '가라국(加羅國)'으로 우뚝 선 뒤 대가야는 산성을 쌓기 시작했다.
영토를 넓혀 밖으로 밖으로 뻗어나가기 위해선 적으로부터의 방어망 구축이 급선무였다
400년대 후반부터 궁성의 1차 방어를 위해 주산성을 쌓은 대가야는 고령읍 본관리산성, 장기리 망산성, 운수면 운라산성, 성산면 풍곡산성 등 궁성의 외곽 방어망도 잇따라 구축했다.
본관리산성은 궁성의 북쪽, 망산은 동쪽, 운라산성은 북서쪽, 풍곡산성은 동북쪽을 각각 담당했다.
대가야는 당시 백제보다 신라쪽 방어에 관심을 쏟았다.
백제 개로왕이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죽고, 수도 한성(서울)이 함락되는 등 400년대 후반 백제는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신라에 대응하기 위해 동쪽 방어선을 마련하는데 집중했다.
운라산성을 중심으로 동북쪽 운수면 의봉산성과 서북쪽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성을 축조해 신라에 기운 성주세력을 견제했다.
또 다산면 월성리토성, 성산면 무계리산성, 봉화산 토성, 우곡면 도진리산성을 통해 낙동강을 따라 동쪽 경계망을 확고히 했다.
특히 무계리산성과 봉화산 토성은 달성군 화원읍의 신라 보루성과 달성군 논공읍 일대를 조망하면서 대치한 동쪽 국경방어의 최전선이었다.
이 때문에 이 두 산성에서는 신라와 인접하면서도 400년대 후반에서 500년대 중반까지 대가야 토기만 출토됐고, 신라토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대가야가 멸망할 때까지 신라가 감히 범접하지 못한 곳이었다.
대가야는 이렇게 고령 궁성지 주변에만 10여개의 산성을 쌓아 도읍지 방어망을 구축한 뒤 서서히 서, 남쪽으로 세력을 뻗쳐 나갔다.
이를 위해 경남 합천지역을 우선 세력권에 편입시켰다.
합천군 합천읍 대야산성과 덕곡면 독산산성은 남쪽과 서쪽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한 방어망이었다.
500년대 초반 이미 합천을 거쳐 거창, 산청, 함양을 넘어 전북 남원, 장수지역에 진출했다.
또 백제 땅이었던 경남 하동 섬진강 하구를 장악하고, 전남 여수와 순천지역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남원군 아영면 성리의 아막산성은 대가야 또는 토착 가야세력이 성을 쌓았다가 이후 백제에 편입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가야가 479년 중국 남제에 사신을 보낸 루트가 고령-거창-함양-남원-구례-섬진강-하동 코스가 유력하다는 점에서도 섬진강 하구의 장악이 이미 500년 이전에 이뤄졌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백제는 512년 왜와 결탁해 여수 일대인 상다리, 하다리와 순천.광양 일대인 사타, 모루 지역을 되찾기 위해 혈안이 됐다.
또 이듬해엔 왜에 사신을 보내 남원.임실 지역 땅을 회복하려고 시도했다.
이에 맞서 대가야는 514년 3월 진주(자탄)와 하동(대사) 지역에 성을 쌓고 봉수대와 저택을 설치, 왜와 백제의 침입에 대비했다.
지리산 신선봉에서 남으로 뻗은 해발 300m 능선 끝자락. 이 곳 하동군 평사리 고소산성은 대가야가 이 때 쌓은 산성의 유력한 후보지로 꼽히고 있다.
비슷한 시기, 대가야는 경남 의령군 부림면(이열비)과 창녕군 영산면(마수비)에도 성을 축조해 신라에 맞섰다.
515년 대가야는 백제 사신을 호위하던 왜의 모노노베노무라지(勿部連)가 수군 500명을 데리고 하동 강가에 이르자, 멀리 신라의 섬으로 쫓아낼 만큼 위세를 떨쳤다.
대가야는 말과 갑옷, 투구, 큰 칼 등 무기와 마구를 갖추고 강력한 군사력을 동원했던 것이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고령.김인탁기자 kir@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사진:주산의 동남쪽 산 중턱에 주산산성 외벽 10여m가 천년의 세월을 견뎌오고 있다. 신종환 대가야 박물관장(사진 앞쪽)은 "대가야 왕궁지 배후에 위치한 이 산성은 주로 왕이 위급할 때 몸을 피하는 피난성의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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