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만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패자도 말이 없다.
그래서 패자는 온갖 오욕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다.
그런 오욕을 뒤집어쓴 인물이 의자왕인데, 그는 황음에 빠져 삼천궁녀를 두었다는 비난까지 들어야 했다.
무능과 황음으로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비난이다.
그러나 의자왕의 실제 모습은 그렇지 않다.
의자왕의 아버지인 백제 30대 임금 무왕(武王)은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국적을 초월한 로맨스로 유명하다.
29대 법왕(法王)의 아들인 그에 대해 "삼국유사"는 어린 시절 참마〔薯:서여〕를 캐서 생계를 이었기에 서동(薯童)으로 불렸다고 적고 있는데 '참마를 캐는 왕자'는 백제 왕실의 이상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힘겨웠던 즉위 과정
실제 무왕의 아버지 법왕과 할아버지 혜왕은 즉위 1년도 못되어 사망하는데 "삼국사기"는 다만 '왕이 돌아갔다'라고 적어 즉위 1년도 못되어 죽은 두 왕의 사인에 대해 굳게 침묵하고 있다.
서동은 선화공주와 결혼하면서 인생역전의 계기를 마련하는데 선화공주는 실제로는 신라 진평왕의 딸이 아니라 미륵사지가 있는 전북 익산지역의 유력호족의 딸이었다.
"삼국유사"는 진평왕이 무왕에게 항상 편지를 보내서 안부를 물었고 '서동이 이로부터 민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삼국사기"는 오히려 무왕이 재위 42년 동안 신라를 여러 차례 공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평왕이 실제로 무왕의 장인이고 그의 편지 덕분에 왕위에 올랐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무왕은 즉위 전에 이미 선화공주와 결혼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자(元子)였던 의자왕은 무왕 33년(632)에야 태자로 책봉되었다.
의자왕은 왜 그때서야 태자로 책봉되었을까.
*전격적인 정적 숙청
그 해답은 "일본서기"에 실려 있다.
'백제에 보낸 사신 대인(大仁)이 와서…, "저 나라(백제)는 지금 대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백제국왕(의자왕)은 신에게 '색상(塞上:당시 일본에 와 있던 의자왕의 아우)은 항상 나쁜 일만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백제 사신의 종자들이 "금년 정월 백제국왕의 어머니가 죽자 제왕자(弟王子:왕의 동생) 교기(翹岐)와 동모매(同母妹)의 여자 4인, 내좌평(內佐平)의 기미(岐味), 거기에 높은 가문의 40여인을 섬으로 추방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일본서기:황극(皇極)1년(642년)조)'
이 기록은 의자왕 즉위(641) 직후 백제왕실에서 벌어진 권력투쟁을 보여주는데 그 한 축은 의자왕이고 다른 축은 의자왕의 모친 선화공주였다.
이것이 바로 의자왕이 무왕 33년에야 태자로 책봉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동생들을 감싸는 모친의 견제에 시달리던 의자왕은 모친 선화공주가 사망하자마자 정적 숙청의 칼을 뽑은 것이다.
*내부의 시선을 외부로
의자왕은 뛰어난 정치력을 갖고 있었다.
정적 숙청 다음달에는 주군(州郡)을 순무(巡撫)하고 사죄(死罪) 이외의 죄수는 모두 석방해 민심을 달랬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의자왕은 권력투쟁에 쏠린 내부의 시선을 외부로 돌렸다.
그해 7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쳐서 미후성(城) 등 40여 개 성을 함락시켰던 것이다.
다음달에는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합천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해 성주 김품석(金品釋)과 부인 고타소를 전사시키고, 남녀 1천여인을 잡아왔다.
재위 8년에는 의직(義直)을 보내 신라 서쪽 10여개성을 빼앗고 9년에는 좌장(左將) 은상(殷相)에게 정병 7천을 주어 신라의 석토성(石吐城) 등 7성을 빼앗았다.
이런 군사공격은 외교술로 뒷받침되었다.
의자왕은 신라만을 주적으로 국한시키기 위해 재위 2년에는 과거 적국이던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그 결실로 백제.고구려 연합군을 결성해 신라의 대당교통로인 당항성(黨項城)을 공격했다.
의자왕의 이런 군사.외교적인 공세에 신라는 당황했다.
선덕여왕은 부랴부랴 당에 사신을 보내 군사 지원을 요청하면서 김유신을 보내 백제의 공격을 막게 했다.
신라는 의자왕의 공격으로 공황상태에 빠진 것이다.
*즉위 초기 부흥군주
즉위 초의 의자왕은 이처럼 백제 부흥군주였다.
그러나 그는 곧 한계에 부딪혔다.
그가 제일의 가치로 삼은 것은 왕권강화였다.
신라 공격도 통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내의 시선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그의 왕권강화책은 호족들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수서(隋書)" '백제'조는 백제에 대성8족이라 불리는 사씨(沙氏).연씨(燕氏).협씨(氏) 등 여덟 씨족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이들은 합의기구인 좌평을 장악하고 국왕을 견제했다.
이런 이중 지배체제를 국왕 단일지배체제로 바꾸려는 의자왕의 계획은 사실 필요한 정치개혁이었다.
문제는 그의 정치개혁이 왕권강화라는 작은 목표에 맞춰졌다는 점에 있다.
그는 재위 15년(655)에 '태자의 궁을 수리하였는데 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했으며 왕궁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지었다'라는 "삼국사기" 기록처럼 태자궁을 화려하게 짓어 왕실의 위엄을 높이려 했다.
왕권강화는 목적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어야 했으나 그는 왕권강화를 종착점으로 삼았다.
이는 대야성 함락으로 딸 고타소를 잃은 김춘추가 개인의 복수를 넘어 삼국통일이라는 거대한 어젠다를 제시해 신라 내부를 통합한 것과 달랐다.
의자왕의 이런 왕권강화책에 호족들은 반발했다.
호족들은 은퇴나 간쟁, 심지어 신라와 내통하는 것으로 의자왕에게 저항했다.
대좌평 사택지적은 의자왕 14년에 정계에서 은퇴하는 것으로 의자왕에게 반발했으며, 성충은 잘 알려진대로 극간(極諫)하다 투옥되었고 좌평 흥수(興首) 역시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현 전남 장흥)으로 귀양갔다.
심지어 나라 살림을 도맡던 좌평 임자는 의자왕 15년 김유신과 내통했다.
의자왕은 이런 반발에 주춤하기는 커녕 재위 17년(657년) 정월 자신의 중자(衆子) 41명을 좌평으로 삼고 각각 식읍(食邑)을 주었다.
그간 좌평은 호족들의 자리였을뿐만 아니라 그 정원은 6명에 불과했는데 두 관례를 한꺼번에 깬 것이었다.
호족들의 자리를 자신의 아들들로 대치한 이런 조치들은 표면적으로 의자왕의 왕권을 강화시켰지만 내부 시스템은 붕괴되어갔다.
*내부 시스템의 붕괴
내부 시스템의 붕괴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무엇보다 정보가 부실해졌다.
재위 20년(660) 당의 대군이 서해의 덕물도(德物島)로 향하는데도 백제는 이 대군의 목표가 고구려인지 백제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신하들은 사분오열되어 좌평 의직(義直)은 당군이 피로할 때 빨리 공격하자고 주장한 반면 달솔 상영(常永) 등은 신라군을 먼저 공격하면서 시간을 벌자고 주장했다.
의자왕이 귀양가 있는 흥수의 의견을 묻자 그는 전략요충지 백강(白江:금강 하구)과 탄현(炭峴)을 지키라고 조언했지만 이 탁월한 전략은 '흥수는 오랫동안 유배 중에 있어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신하들의 반대로 채택되지 않았다.
"삼국사기" 의자왕조는 '그러는 사이 당과 신라의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거쳤다는 말을 듣고 장군 계백에게 결사대 5천을 거느리고 황산에 나가 신라군과 싸우게 하였다'고 적고 있는데 700년 사직의 왕성을 지키는 결사대가 5천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이미 백제의 내부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했음을 말해준다.
바닷가의 모래성 같았던 의자왕의 강화된 왕권은 나당연합군이라는 한번의 파도에 허물어져 버렸다.
즉위 초 신라를 공황상태에 빠뜨렸던 의자왕은 소정방에 의해 태자 효(孝)를 비롯한 귀족.백성 1만2천800여명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가야 했다.
그해 사망한 의자왕은 역시 실패한 군주들인 손호(孫皓:吳의 마지막 황제), 진숙보(陳叔寶:陳의 마지막 황제)의 무덤 곁에 묻히는 것으로 대실패로 끝난 인생을 마감했다.
왕권강화는 어젠다를 실천하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란 사실을 망각한 결과였고 삼국통일이라는 어젠다에 모든 것을 건 신라를 교훈으로 삼지 않은 결과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거여(巨與)견제나 탄핵심판보다 상위의 가치는 우리 사회의 미래이건만 말의 성찬인 선거판에서도 이런 어젠다는 제시되지 않는다.
거여가 견제되면, 혹은 탄핵이 심판되면 우리의 미래는 나아질 것인가. 이런 확신이 없기 때문에 유권자들은 어느 쪽이든 흥이 나지 않고 선거 결과에 대해 불안하다.
'한국을 배우자'던 중국은 이미 고속도로를 질주하는데….
역사평론가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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