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새 나도
그 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이 시대 아버지들의 자화상을 그린 소설 '아버지'로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신 작가 김정현씨. 그가 최근 펴낸 산문집 '아버지의 편지'에는 자식에 대한 아버지들의 마음이 진솔한 필체로 담겨 있다.
'세상 아비들의 마음은 다르지 않은 듯싶다.
아비가 되는 그 순간부터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자식에게만은 한을 대물림하지 말아야지. 스스로 꿈을 접는 설움도 겪게 하지 말아야지,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게 될 일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아야지……. 아비들은 어쩔 수 없는 죄인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스스로의 삶조차 기꺼이 희생하는 존재가 아버지다.
그러나 대다수 아버지들은 가슴 속에 자리한 자식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좀처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항상 말없이 사랑과 근심으로 자식들을 돌볼 뿐이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아버지는 무섭고 무뚝뚝하며,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존재'로 비쳐지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 아버지가 만날 수 없는 대상이 됐을 때에야 그 사랑을 뒤늦게 깨닫는 자식들이 많은 연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김종길 시인이 쓴 '성탄제'에 나오는 주인공도 서른 살의 나이가 돼서야 아버지를 회상하며 새삼 진한 부성애를 느낀다.
시간적 추이에 따라 전개되는 이 시는 먼저 열병을 앓고 있는 어린 시절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변변한 약을 구하기 힘든 어느 시골의 겨울밤, 어린 자식이 고열로 고생하는 것을 보다 못한 아버지는 눈길을 헤치고 열을 내리는데 효험이 있다는 붉은 산수유 열매를 구해온다.
아버지가 따온 산수유 열매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뜨거운 볼을 비비며 주인공은 열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른이 된 주인공은 열병을 앓던 어린 시절을 오히려 그리워한다.
그 때 가슴에 서려 있던 열병이 지금에 와서는 그리움으로 대신 자리잡은 것이다.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은 '엄부자모(嚴父慈母)'로 대변되는 유교적 전통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차가운 옷자락안에 감춰진 깊고 뜨거운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눈 내리는 겨울밤, 어느 도시에 선 주인공은 아버지가 따온 '산수유 열매'가 자신의 혈액 속에 생명의 원소가 돼 끈끈하게 녹아 흐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것은 육친간의 순수하고도 근원적인 사랑이 늘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하면서 아버지와 자식간에 이어지는 탄생의 본질적인 의미를 환기시켜 준다.
그리고 주인공은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자식을 지극하게 사랑했던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자신도 그런 아버지가 될 것을 다짐한다.
끈끈한 인연으로 얽혀진 아버지와 자식. 그 자식도 다시 어버이가 돼 그 아버지의 사랑을 자식에게 전하면서 다시금 인연의 끈을 맺는다.
작가 김영현씨는 '사나이 대장부의 눈물'이란 글에서 그 인연의 돌고 돎을 이렇게 얘기했다.
'나도 이젠 두 아들의 아비가 되었다.
나는 아버지를 잊고 살지만 내가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서 무언가 말을 할때면 어느 순간 갑자기 내가 또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 안기는 듯한 기분에 싸이곤 한다'.
이대현기자 sk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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