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버지-(8)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돌이킬 수 없이 늙어버린 육체를 바라보는 괴로움, 무너진 기대에 대한 슬픔과 쉬지 않고 걸어온 삶의 피로, 이루어 놓은 것이 없는 인생에 대한 회한…,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늙어 사그라지는 이 시대 모든 아버지의 모습은 아닐까.

리얼리즘 연극의 고전 '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a Salesman·아서 밀러 작)은 거대한 물질문명의 횡포와 자본주의의 폐해를 거론할 때 자주 인용되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만큼 벼랑 끝으로 내몰린 쓸쓸한 아버지 상을 표현한 연극도 드물지 싶다.

'어떤 2막의 사적 회담과 진혼가'라는 부제에서 짐작되듯 이 연극은 늙고 지친 63살 외판원(세일즈맨)이 해고당하고, 자식에게 실망해 자살하기까지 하루 동안의 과정을 2막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 작품은 과거의 가치를 믿지만 시대에 뒤쳐지는 1950년대 미국 가장의 모습과 IMF 시대를 지나오면서 버려진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36년간 세일즈맨의 삶을 살아온 윌리 로만은 평생을 바쳐온 회사로부터 '오렌지처럼 알맹이는 빼먹고 껍질만 던져버리듯' 해고당하고, 자식으로부터 "뼛골 빠지게 일이나 하고 결국 쓰레기통 속에 처박히는 세일즈맨에 불과하다"며 무시당한다.

모든 아버지들이 그렇듯 자식들이 기대한 만큼 성장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큰아들 비프는 34살이 되는 지금도 아직 안정된 직업이 없고, 둘째 아들 해피도 정착하지 못하고 허황한 삶을 살고 있다.

아들들의 출세를 꿈꾸며 살았던 윌리로서는 여간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다.

결국 절망에 빠진 그는 가족들에게 생명보험금이라도 남기기 위해 자동차 사고를 가장한 자살을 택하지만, 그의 죽음은 아내 린다의 "이제 집의 월부금 내는 일도 다 끝난 마당에 정작 집에 살 사람은 가고 없다"는 자조처럼 허무할 뿐이다.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윌리를 요즘 자식들은 과연 어떤 눈으로 바라볼지 궁금해진다.

마지막 사랑을 불사르는 안타까운 부정(父情)일까, 아니면 비겁한 행동일까.

"아버지가 위대한 사람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는 큰돈을 번 사람도 아니요, 신문에 이름이 난 적도 없다.

그러나 그 분은 한 인간이었어. 그러니 우리가 아껴 드려야 해. 늙은 개처럼 길가에 쓰러져 죽게 할 수는 없단다". 남편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을 담고 있는 아내 린다의 이 말은 이 작품이 주는 아버지에 대한 헌사는 아닐까. 또 1949년 초연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이 작품이 다시 무대에 오르고 회자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 현대희곡의 거장 아서 밀러는 "아이러니 하게도 이 비극적인 작품을 통해 희망과 용기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정욱진기자 pencho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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