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 대가야-(51)연구.발전 방안-좌담회

매일신문 창간 57주년 특별기획 '아! 대가야' 시리즈(2003년 7월7일~2004년 6월21일)를 갈무리하면서 '대가야, 어떻게 계승.발전시킬 것인가'란 주제의 좌담회를 마련했다.

대가야사의 현대적 의미를 비롯해 시.공간적 범위와 문화적 특성, 성장배경, 역사 계승방안 등에 관해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이번 시리즈에 대한 평가도 곁들였다.

△사회=대가야가 최근 관심을 모으는 배경은 어디에 있나. 또 대가야 역사가 현재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주보돈=과거에는 가야 하면 대개 금관가야가 떠올랐다.

금관국이 망한 뒤에도 김유신 등 후예들이 신라에서 활동했고, 특히 전체 김씨 700여만명 중 김수로왕의 후손인 김해 김씨의 수가 450만 명에 달할 정도로 압도적인 것도 금관가야가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은 요인이 됐다.

그러나 70년대 후반 이후 고분발굴을 통해 자료가 축적되면서 가야의 중심이 김해가 아니라 대가야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록과 자료가 미비한 약점이 있지만, 고분규모나 유물의 위상을 통해 볼 때 김해보다 고령 대가야가 가야사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대가야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역사의 제자리 찾기'다.

△김세기=대가야가 부각된 계기는 1977년 고령 지산동 44호, 45호 고분의 발굴이었다.

또 78년 지산동 32호 발굴 때 금동관이 나왔고, 이는 신라 천마총 이후 가장 많은 관심을 끌었다.

'영남고고학회'의 활발한 활동도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밝혀내는데 한몫 했다.

△윤용섭=대가야가 상상 이상으로 규모가 컸고, 가야전체의 맹주로 경남 서남부와 호남동부 등지를 활보했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관심의 초점이 된 것으로 보인다.

△사회=역사적으로 대가야의 시.공간적 범위를 어떻게 보고 있나.

노중국=고고 자료를 보면 대가야의 영토범위가 당초 고령읍을 비롯한 고령과 합천 중심에서 점차 상당히 넓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세기=대가야의 원류를 알 수 있는 고인돌(支石墓)이 고령을 중심으로 약 7개 권역별로 분포돼 있다.

지난해 고령 반운리 시굴조사를 통해 나무널 무덤(木槨墓)과 쇠화살촉 등이 발견된 점으로 미뤄, 이 일대와 양전리 알터암각화를 중심으로 대가야 초기 소국인 반로국(半路國)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노중국=80년대 황강을 기점으로 남강, 섬진강 일대를 개발하면서 많은 유적지를 발굴했다.

그 결과는 고령양식 무덤과 토기가 많이 나왔고, 역시 그 일대가 대가야 권역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세기=지산동 고분은 4세기말과 5세기 초부터 형성됐다.

당시 고령지역에는 4개 권역으로 고분분포가 나타난다.

이 때부터 고령양식 토기가 만들어졌고, 5세기 중반까지 합천 거창 함양 남원까지 전파됐다.

5세기 중반 이후 무덤은 다곽분(多槨墳)으로, 껴묻이널(殉葬槨)을 5개에서 32개까지 갖춘 형태를 띤다.

이 시기 대가야 양식 토기는 의령 진주 산청을 지나 백두대간 넘어 장수 진안과 섬진강 상류까지 퍼졌다.

479년 대가야가 중국에 사신을 보낸 문헌기록도 이 시기 대가야가 가장 강성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회=대가야의 문화적 특성과 수준은 어떠했나.

△노중국=건국신화의 형식이 문화적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금관가야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강족(天降族)이 중심이지만, 대가야는 정견모주라는 가야산 여신이 강조된 게 특징이다.

△김세기=대가야에만 금관과 금동관의 관모(冠帽)가 있고, 금관가야나 아라가야는 확실한 관이 없다.

또 대가야는 철제 무기와 갑옷, 투구 등을 풍부히 갖췄지만 함안과 김해는 그렇지 않다.

특히 대가야는 무기가 풍부한 대신 교역품이 거의 없는 것으로 봐 무력에 의한 정복이 큰 특징이며, 그 무력을 바탕으로 백제나 중국으로 갈 수 있었다.

또 초화형(草花形) 금관과 독특한 귀고리 등은 신라의 그것과 구별된다.

토기의 경우 곡선과 균형의 조화, 미적 감각이 도드라진 문양, 밝은 금속성이 나게 만든 소성력 등이 신라토기와 차별성을 갖는다.

△윤용섭=고유의 악기인 가야금을 만든 것이 대표적이다.

가야금을 통한 우륵 12곡에는 음악 춤 연주 등과 결부됐고, 예약사상이 스며 있다.

신라가 가야금의 영향을 받아 궁중음악을 만든 것도 주목할 만하다.

△김세기=고분의 형태도 두드러진다.

가야의 무덤 양식은 크게 금관가야 아라가야 대가야식으로 나눌 수 있다.

금관가야는 멸망 때까지 주로 목곽묘 중심이었다.

대가야와 아라가야는 목곽묘에서 수혈식(竪穴式) 석곽묘로 발전했다.

그러나 아라가야는 한 무덤이 아무리 커도 안에 널(槨)이 하나만 있는데 비해, 대가야의 무덤은 다곽분이다.

특히 부장품 널(副葬槨)이 있고, 순장곽이 여러 개 있는 게 대가야 무덤의 특징이다.

또 금관가야의 묘제는 김해에만, 아라가야의 묘제는 함안에만 주로 분포하지만, 대가야의 묘제는 고령뿐 아니라 산청 합천 함양 등지로 넓게 나타난다.

△주보돈=신라가 목곽묘에서 적석(積石) 목곽묘로 나아갔다면, 대가야는 목곽묘에서 수혈식 돌방무덤(石室墓)으로 갈라진 게 차이점이다.

대가야의 특징적 문화는 묘제뿐 아니라 문화적 복합양상을 띠었다는 것이다.

대가야 문화가 고구려 백제 신라 왜(倭)계 요소를 함께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대가야 고분의 입지적 특성은 있는가.

△노중국=신라는 주로 평지에 무덤을 조성했지만, 대가야는 능선 높은 곳에 고분을 배치하고, 봉분(峰墳)을 크게 만들어 지배층의 위용을 과시했다.

△김세기=고분을 산성 바로 밑에 쌓았다는 것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특히 대규모 순장곽은 대가야의 독특한 매장문화다.

고분 규모가 크고 순장곽 수가 많은 것이 대가야 묘제의 특징이다.

△사회=대가야가 크게 성장 발전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나.

△노중국=일단, 가야 중 제일 크다는 의미로 대가야였고, 상대적 의미로 소가야가 있었다는 것은 대가야의 위상을 방증하고 있다.

△주보돈=대가야가 국가로서 두각을 드러낸 것은 4세기 대다.

특히 5세기 중반 무렵부터는 가야 중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각됐다.

대가야 성장 기점을 광개토왕의 남정(南征;400년)에서 찾는 견해도 있지만, 이보다 앞선 4세기 대에 이미 유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그 성장배경으로 철을 들 수도 있지만, 역시 고령을 중심으로 한 인간의 활동에 무게를 둘 수 있다.

뭔가 힘을 가질 만한 인물들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김세기=지산동 32호분에서 금동관과 철제 갑옷 투구를 가진 왕, 순장곽 5개와 마구를 가진 30호분의 왕, 순장곽 32개를 가진 44호분 지도자 등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주보돈=당시 대가야에는 백제의 후원을 입었던 세력이 포진했을 가능성이 있다.

백제가 동쪽으로 진출하면서 신라를 견제할 파트너는 바로 대가야였다는 점이다.

또 5, 6세기 대, 대가야가 발전할 즈음 낙동강은 중요한 교역 루트였고, 대가야와 신라 사이에서 국경선의 의미로 굳혀졌다.

이 때문에 대가야는 낙동강 서쪽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섬진강 수계를 활용해 백제영역으로 재진출해 들어가는 양상이었다.

고령에서 인접한 합천 거창 함양 산청 등을 중심으로 남원 장수 진안으로 세력권을 확장한 뒤 섬진강 수계로 하동까지 나아간 것이다.

△노중국=가야의 주도 세력이 김해에서 고령으로 옮겨간 요인으로 400년 고구려 남정을 무시할 수 없다.

대가야는 전투에 적극 개입하지 않으면서 타격을 적게 입었을 것이다.

이는 대가야가 주도권을 갖게 된 외적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내적으로는 합천 야로와 철이 갖는 의미가 크다

교역뿐 아니라 쇠로 만든 무기와 무장력이 대가야 성장의 내적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농기구, 무기, 장신구를 바탕으로 한 생산력과 무력이 합쳐져 팽창했을 것이다.

△주보돈=대가야 세력권은 단계적으로 넓혀졌고, 직접지배영역과 간접지배 영역이 있었다.

연맹이나 동맹 세력도 존재했다

세력을 점차 확대하면서 다양한 스펙트럼과 단계가 병존한 사회였다.

따라서 대가야는 고령만이 아니라 고령을 중핵으로 일정한 범위를 갖는 다양한 세력의 통칭이다.

△김세기=택리지에 나오듯 대가천 안림천이 범람하지 않고, 물이 마르지 않아 곡식이 많이 나온 기름진 땅도 성장의 기반이 됐다.

비록 평야는 좁지만 이를 기반으로 야로의 철을 가지고 세력권을 확장했다.

이처럼 대가야는 고구려 남정 이전부터 왕의 역량과 곡물 및 철 생산을 기반으로 조직화돼 막강한 세력으로 나타났다.

△주보돈=가실왕과 우륵이 '가야금'이란 새롭고 독특한 악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도 다른 가야세력과의 역량의 차이를 보여주는 사례다.

△노중국=가야금은 그 속에 유교 이데올로기를 포함한 하나의 통치수단이었다.

특히 '기술사적' 측면에서 대가야의 과학기술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명주실을 꼬는 기술, 크기와 깊이와 울림의 조화를 내는 도량형의 발전, 과학적 인식 등을 통해 대가야의 무기나 생활필수품, 공예품의 기술수준까지 유추해 볼 수 있다.

△윤용섭=대가야가 백제와 신라의 각축장의 중간에 위치하면서 강력해질 수 있었다.

가야금을 통한 독창적 소리와 작곡능력 등 문화적 수준과 교역수준도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대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발전시킬 방안과 각계의 역할을 짚어보자.

△주보돈=가야권 개발은 김해가 한발 앞섰다.

김해는 15년 전부터 국제학술행사 등을 지속적으로 벌이고 김해박물관 건립이란 성과를 냈으며, 언론도 금관국 중심의 가야를 크게 부각시켰다.

민.관.학계가 합쳐 뭔가 했을 때 정치권의 지원도 얻을 수 있다.

△노중국=왕릉전시관(지산동 44호분 모형)을 만든 것은 고령이 처음이었고, 이를 계기로 대가야에 대한 인식을 크게 넓혔다.

'가야사 연구' 등 책과 도록의 출판, 학술행사 등을 주도한 경북도의 역할도 컸다.

지방자치단체의 이같은 뒷받침이 절실하다.

△윤용섭=대가야문화의 연구가 단편적으로 이뤄졌다.

지자체도 대가야권 개발사업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미약하고 비체계적이다.

지금까지 가야문화권 국책사업이 금관가야 중심으로 이뤄져왔다.

내년부터는 시.도민, 학계, 지자체가 합심해 대가야권을 중심으로 국책사업을 일궈내야 한다.

△주보돈=가야는 멸망했지만, 7세기 중반 빼어난 외교문서를 작성한 대가야 출신 '강수'란 인물 등을 통해 가야문화가 결국 신라의 핵심문화로 뿌리내리게 됐다.

지역에서 중앙과 다른 지방문화의 핵심고리가 바로 대가야 문화다.

대가야가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돼 지역에 뿌리내리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윤용섭=정부와 지자체 차원의 연구, 발굴지원 등이 필요하다.

고령은 학술행사 등을 활발히 벌이고, 경북도는 대가야를 한 섹터로 묶을 수 있는 '테마파크' 개발이나 발굴 등에 지원해야 한다.

대가야의 역사문화에 대한 인식의 확산을 위해 초.중.고 차원의 교육도 필요하다.

특히 지역 중심의 역사교육을 '교육혁신안'에 포함시켜야 한다.

△주보돈=대가야 문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복원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김세기=가야금을 소재로 한 소설 '현의 노래'가 있지만 더 재미있는 것도 만들 수 있다.

가야산신 정견모주 신화, 알터암각화, 철과 토기 등 소재는 다양하다.

△윤용섭=수로왕릉과 허황후 스토리 등이 금관가야를 부각시킨 한 요인이었다.

김해는 5억원을 투입해 역사다큐멘터리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를 만들고 있다.

대가야도 건국신화 등을 바탕으로 문학작품이 나올 수 있다.

△주보돈=새로운 문화유적 연구, 고고자료 축적, 답사 등 활동이 확산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객관성을 가진 모임이 필요하다.

중원고구려비를 발견한 충주 '예송동우회'나 유적답사와 보호운동을 펴고 있는 함안 '아라가야 향토사연구회'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

지방자치단체장의 의지와 민간단체의 활동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

대구에서 '대사모'(대가야를 사랑하는 모임)를 활성화하고, '대가야의 밤' 행사 등을 지속하면서 대가야 문화를 시민들에게 안착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김세기=지자체간 배타적 이기성 때문에 대가야 문화의 확산이 어렵다.

시.군 단위 지방자치단체의 맹점을 극복해야 한다.

사회='아! 대가야' 시리즈에 대한 총평과 아쉬운 점을 짚어보자.

△김세기=구성과 취재의 실재, 사진 등이 전반적으로 성공적이었다.

일반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독자들에게 지엽적 차원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대가야사를 정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지면구성을 획기적으로 할애했고, 단편적인 것을 일목요연하게 종합했다.

△윤용섭=당초 대가야 관련 자료가 부족해 1년 동안 제대로 끌고 가겠느냐는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내용의 깊이나 사진이 좋았고, 고대의 한 왕조를 되살리다시피 했다.

△주보돈=자료가 부족해 대가야의 복원이 쉽지 않다.

전문가들의 자료발굴 의지와 관심이 확대돼야 한다.

전문가를 포함한 지역별 민간조직의 관심과 각성을 촉구해야 한다.

'대가야 시리즈'엔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교역 왕국' '철의 왕국' 등 다소 과장된 표현도 있었다.

철 왕국의 실재, 내륙을 통한 교역의 이점 등 대가야의 묻힌 실체를 제대로 벗겨내야 할 과제가 남았다.

△노중국=순장곽 인골에 대한 유전자 분석, 대가야인 모습복원, 시민강좌 등 당초 계획이 완벽하게 실천되지 않아 아쉽다.

책 출판 이후에도 시민강좌 등을 이어나가는 방안을 고려해보자.

△주보돈=지역문화에 대한 관심과 자료 등이 확충돼야 질적으로 더 높은 내용이 나올 수 있다.

빈 구석을 더 채워야 한다.

신문사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고, 5년이나 10년 뒤엔 '신(新) 대가야'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회=장시간 좌담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김병구기자 kbg@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사진: 대가야 자문단 위원들이 매일신문사 3층 회의실에서 '대가야 어떻게 계승·발전시킬 것인가'를 주제로 토론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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