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은 만인에 대한 적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우리를 괴롭힌 한 해였다.
대통령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분을 국회에서 다수의 힘으로 탄핵하더니, 이번에는 그 반발로 허구한 날 촛불 시위가 그치지 않았고 마침내 그 세력이 새 국회의 다수당이 되었다.
두 세력은 보수와 진보라는 이름 아래 사사건건 대립해 왔으며, 그 갈등과 분열의 풍경은 세모를 앞둔 지금도 여전하다.
상황이 이렇듯 치열하게 된 데에는 물론 원인이 있다.
사반세기를 넘는 군사독재 체제와 그 후유증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왜곡된 역사가 그것이다.
그러나 요약은 쉽지만 그 처방은 쉽지 않다.
청산하고 새 출발하면 될 것 같은데,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우리 모두 바로 그 역사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 독재시대에 철공장이 생겼고, 고속도로가 놓였고, 자동차를 타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 육체적, 물질적 실존을 어느 누가 부인할 수 있으랴. 때문에 독재 타도를 외치면서도 조금쯤은 민망할 수밖에 없었고 역사의 모순과 아이러니를 체험하면서 까닭 없이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독재시대는 끝났다.
그러나 그와 관련된 유제(遺制)들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여당이 앞장서고 있는 이른바 4대 입법 추진의 현실은 독재의 퇴장과 더불어 이러한 정치환경도 청산되거나 개선되어야 할 당위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당위성이 말처럼 그렇게 쉽게 실행될 수 없다는, 보다 깊은 현실인식이 간과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버마스가 말하듯, 이론과 실천의 충돌은 여기서도 한 전형적인 사례를 부각시킨다.
책상 위의 당위성은 삶의 복합성과 만나면서, 보다 더 질팍한 당위, 즉 실존의 당위와 씨름할 수밖에 없게 된다.
어떻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문제는 사회적 정의와는 다른 차원에서의 가치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치에 항거하여 싸우다 죽은 본회퍼와는 또 다른 시각에서, 나치시대를 살다간 대학총장 하이데거와 시인 G 벤이 존경받는 독일의 현대사에 우리가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 비록 어두운 시대를 살아온 사람일망정, 인간은 논리적 타당성대로만, 그의 복잡한 삶이 단순하게 평가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에게 가능한 유일한 선택이 있다면 거듭나는 길밖에 없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로 이어지는 주기도문의 내용은 기독교만의 교리 아닌, 인간사회의 진리이리라. 대체 다른 어떤 길이 유효하겠는가. 모든 인간은 유한한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온갖 제도의 틀 안에서 생존할 수밖에 없는 것을.
가치가 새로워지고 모델이 새로워져야 한다.
사람이 새로워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못난 사람, 부족한 사람 , 청산되어야 할 사람에게는 가혹한 매질 대신 사랑이 명약이다.
과거 독재시대 탄압받고 유린되어 온 386세대의 투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정치인이 되었다, 그들이 바라고 외쳤던 것은 민주주의였다.
이제 그들은 바람직한 민주주의를 보여줄 위치를 확보하였다.
젊은 열정과 혈기로는 과거의 탄압자들과 그 세력, 그 제도를 싹 쓸어버리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과정과 모습은 그들이 비판하고 매도했던 과거의 세력들과 분명히 달라야 한다.
이제 그들은 무엇보다 겸손하고 온유해야 한다.
무엇이 참 민주주의인지 작은 것부터 보여주어야 한다.
그들이 과연 무엇을 위해 싸워왔는지 온 국민 앞에 증거해 준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는가.
조금이라도 손해보면 결코 참지 않고 싸우고자 덤비는 거친 마음들은 올해와 더불어 조용히 잦아들었으면 좋겠다.
걸핏하면 데모하고, 단식하고, 소송하고…. 왜 이렇듯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험악하게 주장하는 것인지. 진리는 메이커인 신의 것. 기껏해야 제품인 우리들, 너무 교만하고 높은 목소리로 시끄럽게 살아온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일이다.
자, 새해부터는 무엇이든 낮은 목소리로 말합시다.
이 시대의 강자인 민주투사들부터 모범을 보여준다면 오죽이나 평화로울까. 김 주 연 문학평론가·숙명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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