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오늘날 과학은 객관적이고 전문적인 영역이자 기술적 진보를 이끄는 학문으로서 권위와 유용성을 인정받고 있지만, 이러한 과학의 이미지에 대한 비판 또한 적지 않다. 다음에 제시된 글을 잘 읽고, 이를 바탕으로 과학의 특성과 한계를 지적하고, 현대 생명 과학의 발전을 둘러싼 논란과 관련지어 과학을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바람직한지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
(띄어쓰기 포함 1,400자 ±100자)
(가) 피타고라스주의자와 플라톤의 후계자들이 추구했던 성찰적 방법(근대에는 데카르트, 피히테, 크라우제, 헤겔이 추구했고, 현대에는 베르그송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추구하였다)은 개인의 정신이나 영혼을 탐구하여 우주의 법칙과 생명의 비밀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려 한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오늘날 슬픔과 동정을 낳을 뿐이다. 재능을 터무니없는 망상에 낭비하기 때문에 동정을 받고, 모든 시간과 일을 비참하게 낭비하기 때문에 슬프다.
문명의 역사를 보면 계속된 형이상학의 시도가 자연의 법칙을 밝히는 데 얼마나 쓸모없었는지 잘 알 수 있다. 인간의 지성이 실제를 무시하고 자기 내면에 몰두할 때 지성은 더 이상 생명체나 주변 세계의 가장 간단한 작동도 설명하지 못한다.
현상은 감각 기관 앞에서 분열 행진을 하듯이 지성에 주어진다. 지성은 관찰, 묘사, 비교, 차이에 바탕을 둔 분류 등의 신중한 작업에 자신을 한정할 때만 진정으로 유용하고 생산적이다. 근저의 원인과 경험 법칙에 대한 지식은 귀납적 방법을 통해 천천히 알게 된다. 흔한 말이지만, 과학이 제1원리를 해결할 수 있다고 희망해서는 안 된다. 즉, 과학이 우주 현상의 외양 아래에 숨겨진 기반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클로드 베르나르가 지적했듯이 과학자들은 현상의 결정론을 넘어설 수 없다. 대신에 과학자들의 사명은 관찰된 변화가 '왜 일어나는지'가 아니라'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보여 주는 것으로 제한된다. '왜 일어나는지' 하는 문제는 철학의 시각에서는 적절한 목적이긴 하지만, 실제 과학 활동에서는 주제넘은 도전이다. 우리가 현상이 일어나는 조건을 알면 그것을 마음대로 재현하거나 제거할 수 있게 되므로 인류의 복지를 위해 제어하고 사용할 수 있다. 예측과 행동은 우리가 현상에 대한 결정론적 시각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이다.
-라몬 이 카할, '과학자를 꿈꾸는 젊은이에게'에서
(나) 다시 한 번 앞에 나온 반전 도형, 특히 루빈의 항아리 도형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그림은 우리들의 지각뿐 아니라 지식 일반이 늘 그림(圖)과 바탕(地)이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지(知)의 주제로 나타날 때에는 반드시 다른 면은 배경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이 구조를 전략적으로 이용한 것이 실험 행위입니다. 실험에서는 문제가 되는 현상이 주위의 다른 요인으로부터 분리되면서 만들어집니다. 즉, 실험 행위에서 대상은 실험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대상은 실험자로부터 독립적이고 반복 가능한 기계적 과정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실험에서의 기술은 대상을 주위의 다른 요인으로부터 떼어냄으로써 그'객관성'을'제작'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들이 지구상에서 만나는 것은 이 실험실에서 얻어진 성과가 각종 산업 기술로, 또는 일상 생활이나 사회 속의 기술로 실현된 모습입니다. 이제는 지상에 인간이 만들어 낸 기술적 변화와 무관한 자연을 찾아보기란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하이젠베르크의 표현을 빌자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지상에서의 자기 자신만을 향하고 있다."('현대 물리학의 자연상')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태 속에서 자연 과학을 영위하려면 한편으로 그 대상은 이미 인간 사회와의 관계 속에 있는'자연'이 되고, 동시에 다른 한편은 그 영위 자체가 인간 사회와 자연의 상호 작용 중의 하나가 됩니다. 즉, 현시점에서 자연 과학을 영위하려는 것 자체가 인간 사회와 자연의 관계에 변화를 초래하므로 이제는 어떠한 실험도 밀폐된 실험실 안에서 가능했던'객관성'을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 무라타 준이치, '포스트 베이컨의 논리란?'에서
(다) 인간적 실존의 재앙이 시작되는 것은 과학적으로 얻어진 지식이 존재 그 자체라고 생각될 때이며, 과학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될 때이다. 그렇게 되면 과학은 과학적 미신이 되며, 이 미신은 사이비 과학의 의상을 걸치고 엄청난 우행(遇行)을 늘어 놓는다. 이러한 우행 속에는 과학도, 철학도, 신앙도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과 철학의 구별이 오늘날처럼 뚜렷하게 이루어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이 구별이 진리에 의하여 이토록 절박하게 요구된 적도 일찍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 과학적 미신의 회색 꽃은 만발하고, 철학은 조락(凋落)한 듯이 보이기만 한다.
순수한 과학으로부터, 또 철학의 근원성으로부터 이렇게 기만적으로 이탈해 감으로써, 우리의 존재 의식은 황폐해 가고 있다. 이리하여 우리의 존재 의식은 스스로를 추상적으로 파악하고 추상적으로 체험하는 공허한 것이 된다. 우리의 존재 의식은 우주 만물은 다만 이러이러하다는 것만 말해 주는 주술로부터의 해방 속에서, 더 나아가서는 사물과 교섭을 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사물 그 자체를 보지 못하게 하는 과학적 미신 속에서 변질되고, 이러한 일탈(逸脫)이 철학에의 길을 차단한다. 철학 하는 것은 이러한 차단물을 돌파하여 인간을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려 주는 일을 과제로 하는것이다.(중략)
그런데 세계에 대한 외경(畏敬)의 눈에는 모든 것이 포괄적으로 보이며, 하나하나의 특수자와 개별자 속에서조차 암호로서의 현실적 세계가 보인다. 이러한 암호는 과학적 연구에는 마치 무(無)와도 같으며, 과학적 연구에 의해서는 입증될 수도 반증될 수도 없다.
- 칼 야스퍼스, '철학적 사유의 작은 학교'에서
(라) 인류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는 생명 공학은 우리 사회에 끊임없이 논쟁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무병 장수와 유전 질환 치료, 식량 증산을 통한 배고픔 해결은 우리에게 멋진 신세계의 꿈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성의 상실과 부자들의 유전자 바꾸기를 통한 우생학, 복제 인간 대량 탄생,'프랑켄푸드'*는 결국 인류를 헉슬리의『멋진 신세계』로 이끌 것이라는 주장이 날이 갈수록 세를 불려 가고 있다. 생명 공학은 21세기의 우리들에게 유토피아(Utopia)로 다가올 것인가, 디스토피아(Dystopia)로 다가올 것인가?
지난해 12월 26일 지구촌은 인류 최초로 체세포 핵 이식 기술을 이용한 복제 인간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화들짝 놀랐다. 미확인비행물체(UFO)와 외계인의 존재, 그리고 외계인의 인간 창조를 믿는 신흥 신비주의 종교 집단인 라엘리언 무브먼트가 만든 인간 복제 서비스 회사인 클로네이드가 그 장본인이다. 복제 인간 탄생 주장은 생명 공학이 21세기의 중심에 섰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한편으로는, 생명 공학이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내달리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감을 주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물론, 클로네이드는 복제 아기가 태어났다는 그 어떤 증거도 내놓지 못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수백 명의 히틀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거나 범죄자를 대량 복제할 수 있다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매스컴을 통해 인간의 기억 속에 복제'각인됐다. 어떤 이는 아인슈타인과 같은 천재나 마릴린 먼로와 같은 미인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닐지도 모른다는 희망 섞인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인간 복제(또는 인간 배아 복제)는 앞으로도 생명 공학 기술 또는 산물 가운데 가장 뜨거운 감자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 신문 기사에서
*프랑켄푸드(Frankenfood):괴물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과 음식(food)을 조합하여 만든 단어로, 유전자 조작 식품(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s)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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