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3월 1일 러일전쟁의 숨은 공로자였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초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조선통감 부임 이후 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한 일제의 작업들은 하나하나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조선통감부는 1906년(광무 10) 2월부터 1910년(융희 4) 8월까지 일제가 한국 병탄 예비작업을 위해 서울에 설치한 기관이다. 1905년 11월 체결한 을사조약의 규정에 따라 1906년 1월 31일자로 일제의 공사관이 폐쇄되고 2월 1일 임시통감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취임함으로써 공식업무가 개시됐다.
일제는 통감부를 통해 한국의 외교권을 대행했고, 이른바 '고문정치'로 내정을 간섭했다. 1907년 6월에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통감부는 이어서 이완용의 친일내각을 위협해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을 체결하고 일본인 차관을 각 부에 앉혀 외교와 내정을 통감의 지휘에 따라 집행케 하는 '차관정치'를 시행했다.
최근엔 당시 조선정책에 있어 온건파에 속했다는 그에 대해 다른 평가들이 제기되고 있다. '그가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죽지 않았다면…'의 논란도 있다. 해방 60년이 되는 해에 화젯거리로는 손색이 없을 듯하다.
▲1898년 한글 전용 경성신문(京城新聞) 창간 ▲1933년 영화 '킹콩' 뉴욕서 개봉 ▲1969년 콩코드기 첫 시험비행 성공 ▲1983년 중'고등학생 복장자율화 시작 ▲1994년 전교조 해직교사 1천135명 4년 만에 교단 복귀.
조문호기자 news119@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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