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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횡단보도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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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배낭 하나 메고 프랑스 파리를 여행했을 때의 일이다.

도착한 첫날 숙소를 찾아가던 길에 큰 도로를 건너게 됐다.

당연한 일이지만 신호등이 빨간불에서 파란불로 바뀌길 기다리며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 내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그냥 길을 건너는 거였다.

신호등의 빨간 불빛이 선명한데도,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마구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무단횡단자들을 위해 달리던 자동차가 스르르 멈춰선 것. 우리나라에선 상상하기도 힘든 일인데, 아니, 그랬다가는 교통법규도 지킬 줄 모르는 반문명인이라고 지탄받을 텐데, 파리에서는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그런데 파리 시내를 단 하루 배회해 보니, 이게 그냥 흔하게 보이는 풍경이라는 걸 알게 됐다.

모든 횡단보도에는 신호등이 있지만, 사람들은 신호법규를 잘 지키지 않았다.

길을 건너기 전 주변을 한번 훑어보고는 빨간불이어도 그냥 길을 건넜다.

자동차들은 그런 보행자들을 위해서 당연한 듯 멈춰서고. 심지어는 경찰이 옆에 서있는데도 그랬다.

하루가 지난 후, 나는 파리 시내에서 신호등을 지키는 사람은 관광객뿐인 것을 알게 됐다.

빨간 신호등에도 그냥 길을 건너는 사람은 파리지엥이거나 장기체류자이고, 규칙을 잘 지키는 이들은 십중팔구 관광객이었다.

이런 사소한 풍경에서 나는 프랑스인들이 자동차보다는 사람을, 제도나 규칙보다도 인간을 먼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건 누가 강요하거나 규정지은 것이 아니라, 그저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익힌 습관 같은 것이었다.

얼마 전 대구 반월당의 횡단보도 존폐를 놓고 논란이 벌어진 적이 있다.

횡단보도를 없애자는 사람들은 달구벌대로의 평균 주행속도가 5분 정도 빨라지는 장점이 있다고 말하고, 그대로 둬야 한다는 사람들은 보행권의 실종을 개탄했다.

물론 한국과 프랑스, 대구와 파리를 단순하게 비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자동차 주행속도를 5분 단축하기 위해서 우리가 너무 많은 걸 잃어버리지 않을까 싶었다.

적어도 속도지상주의에는 '인간'은 없으니 말이다.

무단횡단이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 대구의 횡단보도 앞에 서면 파리에서 감행했던 나의 무단횡단이 생각난다.

이진이 대구MBC 구성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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