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人生에는 은퇴가 없다-(9)양파 캐는 후보자

내무부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1993년 고향의 도백으로 부임하였지만, 채 1년이 못 되어 청와대 행정수석으로 발탁되었다. 당시 문민정부는 역대 정권에서 미뤄왔던 자치단체장 선거를 1995년 시행하게 되었는데, 새로운 정치 실험이었던 터라 국민들의 관심이 쏠렸다. 하지만, 나는 대통령을 보좌하는 행정수석으로서 선거에 관심을 가질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선거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지역분들이 여러 번 서울까지 찾아와 여론이 좋다며 출마를 권유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당시 강하게 퍼져있던 반 여당 정서를 잠재우기 위해 경쟁력있는 인물이 필요하다는 고위층의 정치적 판단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여당 후보로 선택된 것 같다.

나는 선거전에 뛰어들면서 '한 사람을 소중히'라는 원칙을 세웠다. 이것은 계속되는 강행군 속에서 나를 지탱시킨 힘이었다. 하루는 의성을 지나던 중 노부부가 양파캐는 것을 보고 차를 세웠다. 그리고 바지를 걷고 밭으로 들어가 함께 양파를 캤다. 밖에서는 수행원들이 자꾸 시계를 보며 빨리 나왔으면 하는 눈치였는데, 언론보도가 되는 것도 아닌데 왜 저러나 싶었을 것이다. 30여 분 뒤 차에 올라타니 '가야 할 곳이 많으니 스케줄대로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저 더위에 고생하는 노부부를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우연찮게 며칠 뒤 모 방송사 토론회에서 쌀 한가마니 값이 얼마냐는 돌발 질문이 나왔고, 나는 그 날 양파밭에서 들은 게 있어 어려움없이 답변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민들의 시선이 따뜻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칠곡의 시장에서는 상인 한 분이 쫓아오더니 더운데 먹으라고 수박 1통을 건네기도 하고, 영덕에서는 할머니께서 속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1만 원짜리 두장을 꺼내 손에 쥐어 줬다. 경주의 모 사찰 스님과의 인연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처음 만났을 때 그 스님은 나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아마도 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인 듯싶었다. 나는 선거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고 '그저 차나 한잔 마시러 왔습니다'며 세상살이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그런데, 나중에 당선이 된 뒤 다시 찾아갔더니 "사실은 지사님을 찍었습니다"하는 것이 아닌가. 그날 대화를 통해서 내가 살아온 세월에 거짓이나 편견이 없음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최선을 다하다 보니 어느새 투표일이 다가왔다. 나보다 훨씬 더 고생한 운동원들은 '며칠 더 했으면 좋겠다'며 아쉬워 했는데, 다행히 결과가 좋아 그들의 헌신에 조금이나마 보답이 된 듯싶었다. 그리고, 선거운동을 하며 보고 느낀 도민의 바람과 꿈은 취임 이후 경북도정을 구상하고 실천하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의근 경북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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