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네로의 에메랄드 안경

네로 황제는 검투사들의 결투를 구경할 때 에메랄드 보석을 안경처럼 사용했다고 한다.

녹색 빛깔의 보석으로 투영해 보는 원형 경기장의 결투 분위기와 태양빛 아래서 맨눈으로 보는 결투 분위기는 그 느낌이 다를 수 있다. 오페라의 무대 조명처럼 일종의 시각 효과가 보태지기 때문이다.

네로는 똑같은 경기를 구경하면서도 녹색 에메랄드를 끼고 봄으로써 맨눈의 로마 시민들과는 색다른 감흥과 기분을 즐겼을 것이다.

13세기 안경이 발명된 후 녹색 터키석 렌즈안경을 말(馬)에게 씌웠더니 여물을 풀로 착각 하더라는 기록이 있듯이 사람도 어떤 색의 안경을 쓰느냐에 따라 같은 사물이나 현상을 서로 달리 보고 상반되게 판단할 수 있다.

요즘 청와대 사람들과 주변 권력층 인물들의 말과 사고들을 보면 네로의 에메랄드 투시경처럼 자기네 취향의 선글라스들을 단체 맞춤으로 낀 채 민생을 살피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다수 국민이 '우리 눈에는 빨간색인데요'하면 그들은 '아니야 내 눈엔 파란색이야'라고 우기고 한술 더 떠 '너희 국민의 시력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공격한다.

며칠 전 청와대 모 수석 비서관이 국민여론 조사 결과를 두고 '국민의 70%가 학이 검은색이라고 하면 검은 학이 되느냐'며 '국민도 제대로 이성적으로 다 판단하는 게 아니다'고 볼멘소리를 냈다. 70%의 국민이 '이거다'고 해도 '무슨 소리, 그건 틀렸어. 국민은 늘 똑똑한 대중이 아니라 비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우매한 대중들일 수도 있어'라는 면박에 가까운 공격을 해댔다. 참여정부 간판을 내걸었던 대통령조차 '민심을 그대로 수용하고 추종하는 것만이 대통령이 할 일이 아니다'고 했다.

'국민 민심이 수용하고 따라줄 만한 수준이 못 되면 한수 높은 내 소신대로 가는 게 맞다'는 격이다. 그들 눈에는 국민이 약간 모자라는 푼수쯤으로 비치는 듯한 발언들이다. 측근 여당의원의 역성은 더욱 가관이다. '대통령이 지역주의를 암으로 진단했는데 국민이 동의서를 안 써 준다.' 마치 자기 눈에는 대통령의 진단 실력은 명의(名醫) 수준인데 국민들이 어리석게 동의를 안 해 급한 수술을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식이다.

국민 중 어느 누가 지역주의가 암적 문제가 아니라고 진단한 적이 있었나. 그런 진단은 지금 청와대 사람들이 운동권에서 팔 흔들고 다닐 때부터 온 국민이 꿰뚫고 있었던 진단이다. 문제는 국민 눈에 그들의 수술 솜씨가 못 미덥고 수술 방법이나 목적이 찜찜하게 켕기니까 70%나 되는 다수가 동의 안 할 뿐이다. 그들이 그런 식으로 국민을 무지렁이인 양 낮춰 보고 어리석은 대중으로 비하할수록 똑같은 색깔의 맞춤 선글라스를 단체로 끼고 저네들 안목만 옳다고 우기는 거 아니냐는 의구심만 더 깊어진다.

연정 제안, 과거사 조사 같은 사안도 그들이 낀 선글라스를 통해 볼 때는 기가 막힌 멋진 제안일지 모르지만 야당과 국민 눈에는 가려운 곳은 등(경제)인데 남의 다리나 긁는 것으로 비치는지 냉랭하기만 하다. 같은 시대 같은 땅 위에 살면서 어쩌면 이렇게도 관점과 눈높이가 차이 나는가. 대한민국이란 원형 경기장 안에서 똑같은 경제, 안보, 외교, 과거사, 부동산을 똑같이 들여다보면서 무슨 네로의 에메랄드 안경 같은 특별한 선글라스를 꼈기에 매사 수십%씩이나 국민들이 보는 시각과 동떨어지는 주장을 하는 걸까.

그들 주장대로 국민과 야당과 비판 언론이 왜곡된 색안경을 쓰고 있어 국정이 안 풀리고 있다면 국민 쪽이 안경을 벗어 줘야 한다. 반대로 청와대와 주변 집권 그룹이 저들만의 '청와대 표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그렇다면 그들 쪽이 벗어야 한다.

지금의 나라 형편과 국민 살림살이를 살필 때 어느 쪽의 선글라스가 벗어던져야 할 네로의 에메랄드 안경일까는 자명하다.독선과 자만의 선글라스를 벗어라. 그리고 투쟁 대신 평화로운 마음의 눈을 열고 내일을 내다보자.

명예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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