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

밭둑에서 나는 바람과 놀고

할머니는 메밀밭에서

메밀을 꺾고 계셨습니다

늦여름의 하늘빛이 메밀꽃 위에 빛나고

메밀꽃 사이사이로 할머니는 가끔

나와 바람의 장난을 살피시었습니다

해마다 밭둑에서 자라고

아주 커서도 덜 자란 나는

늘 그러했습니다만

할머니는 저승으로 가버리시고

나도 벌써 몇 년인가

그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 후

오늘 저녁 멍석을 펴고

마당에 누우니

온 하늘 가득

별로 피어있는 어릴 적 메밀꽃

할머니는 나를 두고 메밀밭만 저승까지 가져가시어

날마다 저녁이면 메밀밭을 매시며

메밀밭 사이사이로 나를 살피고 계셨습니다

이성선(1941~2001) 고향의 천정

자손에 대한 할머니의 애착과 내리사랑은 거의 폭포수와 같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이승과 저승을 넘나든다. 안 보시는 듯 언제나 우리 곁에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계신다. 집안과 가문이 튼튼하게 이어져 가는 것도 모두 할머니의 이러한 배려와 무제한적인 사랑 덕분이다. 갈 데와 안 갈 데를 구분하지 못하고 진창에서 헤매는 우리를 할머니께서는 저 하늘에서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계신다.

이동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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