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에 시월 봉숭아 한 포기가 붉은 꽃잎을 피우기 위해 온 몸을 뒤척이며 마지막 햇살을 끌어당기고 있다. 어쩌면 늦은 듯도 하지만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스스로를 조율하며 고운 꽃을 피우려는 의지가 차라리 애처롭다.
'은시(銀詩)문학회'가 바로 그런 문학의 꽃을 피우려는 시 동인이다. 문학에 늦게 눈을 뜬 늦깎이들이지만, 비바람 많았던 지난 삶을 시로 승화시키며 그윽하고 향기로운 시를 빚어낸다. 은시문학회는 1995년에 발족했다.
그후 10년 동안 매년 시낭송회를 열었고, 최근 동인시집 제3집을 상재했다. 정경자, 정숙, 변영숙, 김영임, 류호숙, 허명순, 남주희, 여한경, 이선영, 정해경, 이순복, 곽미영, 안봉태 회원의 작품을 담은 것이다. 은시 동인의 뿌리를 더듬어 보면 '대구문학아카데미'라는 울타리가 보인다. 이제 팔순을 넘긴 박주일 시인이 1988년 8월에 '문예창작원'이란 이름으로 시작했으니 벌써 20주년이 가까워온다.
그동안 130여 명의 문학도들이 이곳에서 시의 텃밭을 가꾸었고, 40명가량의 회원들이 대구와 전국 시단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그 중 이선영 시인은 여성문학회 회장으로 동분서주하고 있고, 몇몇 회원들은 시낭송가로 신라문학대상을 수상했으며, 각종 신춘문예와 유명 문예지로 문단에 등단하거나 박경리 토지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박주일 시인의 뒤를 이어 현재 대구문학아카데미 시창작반을 운영하고 있는 정숙 시인은 인터넷 포엠토피아의 포엠스쿨 강의도 맡고 있다. 특히 "인생은 육십부터"라며 "시 공부 시작할 때 나이가 세 살"이라던 김영임, 변영숙 시인은 과연 문학에 나이가 없음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일흔에 시 공부를 시작한 전직 국어교사인 여한경 시인의 문학에 대한 열정도 아무도 못 말린다. 14기인 류호숙, 허명순, 이순복 회원은 팔조령과 팔공산 야외수업 때 막걸리 한 잔에 가요 '봄날은 간다'를 구수하게 뽑아내던 시절을 떠올리며 소녀같이 수줍어 한다.
안봉태 회원은 치매로 누운 시어머니 봉양하느라 늦게 등단했고, 아나운서 출신인 남주희 회원은 편지글 모임의 회장이기도 하다. 가장 젊은 사십대 회원인 곽미영 씨는 현대적 서정시의 묘미를 찾기 위해서는 사물의 뒷면과 깊이를 볼 수 있는 시안(詩眼)과 사고력을 더 키워야 한다며 눈을 반짝인다.
은시문학회 회원들은 시라는 매개체로 나이에 상관없이 끈끈한 우정을 쌓아왔다. 여름이면 청도 유등연지에서 종일 연꽃의 몸짓과 손짓을 관찰하며 자연과 시에 취했다. 경산 당음지의 가시연꽃을 찾아서는 '왜 제 잎을 가시로 뚫어야 하는지' 물음표를 끝내 지우지 못한 채 노을에 젖어 돌아오기도 했다.
동인들은 은시문학회의 자료와 회원 시집 '인동초' 14집, 변영숙의 '오딧빛 꽃댕기', 정해경의 '수리봉의 갈꽃', 정숙의 '신처용가'와 '위기의 꽃', 이선영의 '꽃잎 속에 잠든 봄볕', 김영임의 '일상의 뜨락에서', 여한경의 '괄허집'이 대구 서부도서관 향토문학관 은시 문학회 코너에 비치되었다고 자랑한다.
정경자 은시문학회장은 "살아온 연륜이 깊고 진한 만큼 각자의 시적인 개성도 다양하다"며 "앞으로 주민들을 위한 시낭송회와 시화전을 열고 불우이웃을 위한 자원봉사 활동도 펼쳐나갈 것"이라고 했다.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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