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영어이름 짓기 유행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영어 이름을 하나씩 지어볼까요?"

"피터가 좋아요. 책에서 보면 피터가 좋은 일을 많이 하더라고요."

한 외국어학원에서 원어민 강사와 함께 영어 이름 짓기에 한창인 어린이들의 모습은 마냥 즐거워 보였다. 에밀리, 엘리자베스, 찰리, 데이브….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주인공의 이름을 따기도 한 아이들은 쉽고 재미있는 영어 이름으로 불려지고 싶어했다.

요즘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영어 이름 가지기가 유행이다. 영어 이름으로 명함을 만드는 초등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영어학원·유치원뿐만 아니라 기업체에서 영어 이름을 예명이나 애칭으로 때로는 본명처럼 자연스럽게 부르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

인터넷 사이트 '영어이름작명'(고령군 고령읍) 관계자는 "2천 개 정도 되는 영어 이름 목록에서 남이 안 쓰는 특별한 이름을 찾기 위해 사이트에 들르는 사람이 하루에만 20명이 넘는다"고 했다. 외국 유학을 가기 전에 영어 이름을 만들려는 20대가 전체 이용자의 40% 정도로 가장 많고, 명함 등을 만들기 위해 영어 이름을 지으려는 초등학생이 20%를 차지한다는 것. 나머지는 사업체를 운영하는 30대가 많으며, 40대 이상 이용자는 거의 없다고 했다.

직장인 박명철(41) 씨는 "영어학원에서 회화수업을 들었는데 대학생들이 대부분 영어 이름을 쓰는데 놀랐다"며 자신은 영어 이름이 없어 Mr. Park으로 불리는 것이 어색했다고 말한다.

영어 이름을 쓰는 이들이 늘면서 웃지 못할 일들도 생겨나고 있다. 영어 이름을 쓰는 직원들이 많은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김미숙(32) 씨는 부르기에 예쁜 Hazel이라는 영어 이름을 만들었는데 외국인 동료들이 '마음씨 좋은 뚱뚱한 백인 할머니'를 떠올리게 한다며 놀려 속상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미국·캐나다 등 기독교 국가인 서양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성인을 본떠 이름을 짓기도 하고 미들네임도 있는데 영어 이름을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저소득층 백인 가정, 흑인 가정 등 본인이 원하지 않는 이미지를 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한 영어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는 로널드 토마스 씨에게 한 한국 유학생이 미국에서 쓰는 카일(Kyle)이라는 이름이 어떠하냐고 물으니 "좀더 부유한 상류층 가정에서 자란 느낌을 준다"고 했다.

국제화시대에 외국인과의 거리감을 좁힐 수 있는 영어 이름이 필요하다는 의견과 달리 반대 여론도 적잖은 실정. 직장인 이상희(34) 씨는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이름은 내가 원하는 대로 쓰고 남들도 그렇게 쓰고 읽어 달라고 하면 그만이다"고 했다.

김인환 LIKE외국어학원장은 "만약 유학 가서 영어 이름을 쓴다면 졸업 학위증에도 영어 이름이 적혀 한국에서 인정받기 어려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며 "영어 공부할 때 외국인이 부르기 좋도록 영어 이름을 애칭으로 쓰는 정도는 괜찮지만, 영어 이름을 고집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 이름을 영어 철자로 쓸 때 어떻게 표기하느냐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예컨대 이승만 전 대통령은 이씨를 Rhee로 표기했지만 미8군에서는 Yi로 쓰도록 하고 있고 학교 영어 교과서에서는 Lee로 쓰고 있다. 또 Ri도 쓸 수 있어 혼동이 올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혜영(30) 씨는 Yi라는 성으로 미국 비자를 만들었는데 다른 가족은 Lee를 써 가족인 사실을 입증할 수 없어 어렵게 Lee로 바꿔 비자를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영어 표기법의 불일치로 세계인들이 많이 참석하는 '부산(PUSAN) 국제영화제(PIFF)'도 외국인들이 봤을 때는 뜻이 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부산(BUSAN)에서 열리고 있는 현실. 로마자 표기법이 달라져도 국제적 신뢰성 때문에 부산대학교의 이름도 그대로 PUSAN으로 쓸 수밖에 없어 결국 국제적 학술논문에 'BUSAN에 소재한 PUSAN국립대학'이라고 표시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김복문(충북대 명예교수) 우리말 영어식 표기학회장은 "현재 우리나라의 한글 로마자 표기법은 문제가 있다"며 "영어가 가장 널리 사용하는 국제어가 된 상황에서 올바른 우리말 영문표기법이 하루빨리 정착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수기자 stel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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