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빠름을 나타낼 때 흔히 "쏜살같다", "흐르는 물과 같다"는 말을 쓴다. 워낙 관용적인 표현이다 보니 이미 언어의 싱싱한 생명력을 잃긴 했지만 한 해를 이틀 남겨 놓은 이 시점에 다시금 새겨보니 이보다 적확한 비유가 없을 듯싶다. 이보다는 흔치 않지만 우리네 어머니들은 "헐어놓은 독"같다는 말을 쓰신다. 일단 장독을 헐었다 하면 그 내용물이 김치건, 쌀이건, 장이건 어느새 그 큰 독이 바닥을 쉽게 드러내고 만다. 누가 퍼갔나 싶게 허무하고 도둑맞은 것 같은 그 기분이라니.
한 해를 돌아보니 이제는 바닥을 드러낸 2005년이라는 빈 독 속에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것들이 있다. 우선 회의나 모임 때마다 남발했던 내 명함들. 명함정리를 하다 보니 한 해 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에는 다시 보게 될 사람, 아마도 이후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사람,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 도통 생각조차 안 나는 사람들의 이름이 섞여 있다. 그 명함들을 폐기처분할지 간직할지 고민하다가 그 숫자만큼 뿌려진 내 명함도 누군가의 손에서 쓰레기통으로 직통했던가, 명함집에 꼽히던가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 잘못 만나 어디선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내 명함, 불가능하겠지만 다시 주워 담고 싶다.
다음은 "언제 밥 같이 먹자"던 빈 인사. "나중에 차 한 잔 합시다", "다음에 식사 같이 해요", "조만간 얼굴 한 번 보자"고 말만 해놓고 식언했던 게 한두 건이 아니다. 물론 반가운 마음에, 아니면 미안함을 덜어보려는 심정으로 건넨 인사말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인사치레로 다음을 기약했던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가능하면 그런 식언(食言)들 빈 독 속에 주워 담고 내년에는 좀더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소중한 인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다. 영원한 우방 나의 가족, 존경하는 은사, 내 속내를 나보다 더 잘 헤아리는 친구, 같이 걸어 온 시간만큼 신뢰의 나이테도 늘어나는 직장동료, 발견의 기쁨을 가져다 준 올해 새로 맺은 인연들…, 그들과의 인연에 다시 한 번 감사하며, 그 소중한 기억 잊어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독 안에 채워놓고 싶다.
적고 보니 2005년 빈 독을 다시 채우고 싶은 것들이 모두 사람과 관계되어 있다. 세상살이가 각박해서인지 여전히 사람에 대한 기대가 큰가 보다."가실을 끝낸 들에서/사랑만이/인간의 사랑만이/사과 하나를 둘로 쪼개/나눠 가질 줄 안다"는 시인 김남주의 절창처럼 새해에는 좀더 밀도 있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련다. 2005년 장독을 닫고, 설레는 마음으로 2006년 새 독의 뚜껑을 열면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한다. 독자 여러분도 병술년 새해 편안하시고 강건하시길….
정일선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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