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1989년,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여 이동원과 박인수가 함께 불렀던 향수는 삽시간에 전국민의 애창곡이 됐다. 구구절절 가슴에 젖어드는 시적 아름다움이 우리네 근원적 정서인 향수를 일깨웠기 때문일 것이다.
나른한 오후, 졸음에 겨워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던 늙은 아버지, 솜털 보송보송하던 어린 누이, 농사일'집안일로 사철 맨 발로 동동거리던 아내, 더 이상 곱지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지는 그 아내가 가을 햇살을 등에 받으며 누이랑 함께 이삭줍던 모습, 흐릿한 호롱불 아래 도란도란 얘기 나누던 가족들…. 우리네 기억의 한편에 남아있는 아련한 고향 풍경이다. 안방 문 위 액자속의 빼곡한 흑백사진처럼 그리운 정경들이다.
말 못하는 짐승조차도 고향을 그리워한다고 한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말은 "여우가 죽을 때는 고향쪽으로 머리를 둔다"는 데서 비롯됐다 한다. 또" 오랑캐 말은 북녘 바람에 기대고, 월나라 새는 남쪽가지에 깃든다(胡馬依北風, 越鳥巢南枝)"는 옛 문구들도 그러하다.
고향에 대한 애착은 인지상정이겠지만 특히 우리네 정서는 유별난 데가 있다. 해마다 설'추석 두 차례씩 고향을 찾아 민족 대이동을 하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흔치 않을 것이다. 사할린에서 돌아온 한 할머니는 " 날마다 대문을 열어놓고 고향쪽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지었다"고 말했다.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염원 하나로 수십년씩 살던 사할린과 그곳서 일군 가족을 떠나 다시 이산가족이 된 노인들을 보면 세월이 약이란 말도 때로 틀리다는 생각이 든다. 세월도 치료할 수 없는 병. 업보처럼 질기디 질긴 그리움이다.
지난 29일 하늘나라로 떠나간 비디오 아트의 거장 백남준. 그는 죽기 이틀전에도 한국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한다. 한평생 거칠 것 없는 코스모폴리탄으로서, 끊임없이 새로운 파격을 창조해온 세기적 아방가르드도 향수는 어쩔 수 없었나보다. 열여덟에 떠난 고국을 늘상 그리워했다는 에뜨랑제! 옥신각신거리면서도 이 땅에서 얼굴 마주보고 살아가는 우리는 그런 점에서 행복한 사람들 아닌가.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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