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TV 교육방송에서 '왜, 예쁜 남자 열풍인가?' 라는 주제로 방영하는 토론 프로그램을 문화계에 종사하는 지인들 몇몇과 함께 둘러앉아 시청할 기회가 있었다. 시청을 마친 후 우리는 그 주제에 대해 연장토론을 벌였는데, 나는 나머지 사람들이 갑론을박하고 있는 내용과는 상관없는 엉뚱한 사실에 오히려 주의가 미쳤다.
우리가 그날 토론의 초점으로 삼은 것은 요즈음 극장가에서 공전의 인기 몰이를 하고 있는 영화 였다. 그 제목이 시사하듯 왕의 총애를 입고 비극적 운명에 처하는 광대 '공길'역을 맡은 배우의 특출한 미모가 '예쁜 남자 열풍'의 핵이라는 데는 모두가 공감하였다. 그런데 나 외에 남녀 각각 두 명씩 가담한 그 토론은 어느 정도 진행되면서 슬그머니 남녀청백전식의 겨루기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여성들은 여성의 내적 욕구에 대한 남성 일반의 몰이해를 탓하면서 여자도 남자에게 '예쁨'과 '교태'를 요구할 권리가 있음을 열심히 주장했고, 남성들은 유방과 자궁이 없는 남성의 결핍과 외로움을 더 이상 이해하려 들지 않는 오늘날의 여성들 때문에 스스로 여성성을 취하여 자기 위로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남자들의 처지에 곤욕과 서글픔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나는 이들 입장의 대결구도적 배경에는 오히려 합일의 욕구가 과다하게 도사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다시 말해 자기와 상대방이 같기를 너무 원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페미니스트 철학자 뤼스 이리가라이(Ruce Irigaray)는 우리 시대의 남녀 평등은 양성을 통합시킬 수 없는 절대적 차이를 인정함으로써 가능해지기 시작한다고 얘기한다. 즉, '나'라는 주체와 다른 성(性)을 지니고 태어난 '너'라는 주체는 내가 결코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상이한 존재라는 불가역(不可譯)한 타자성을 인정할 때만 상대에 대한 진정한 존중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결국 한국 사회에 만연한 '우리가 남이가' 식의, 뭉뚱그리고 얼버무리는 사고방식은 모든 상이한 주체들 간의 관계 정립에 도움이 안된다는 얘기다. 나는 그러한 인식이 남녀간의 관계에서뿐 아니라 인종간, 종교간, 세대간 등 무릇 차별을 지양하고 평등을 추구해야 할 관계들 전반에 적용되어도 좋을 사고의 패러다임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이 서로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사랑을 느끼는 것은 상대[人]에 대한 조망을 할 수 있는 거리 즉 사이[間]가 존재할 때에 가능해진다. 인간 존재의 생래적 조건인 그 거리를 부정하고 상대의 '나와 같지 않음'을 탓하기 시작할 때 세상의 허다한 소모적 쟁의와 불필요한 마찰은 생겨나고 나아가 더 큰 불행인 전쟁도 불사하게 되는 것이리라. 이제 우리도 과거로부터의 통합주의적 인습들을 과감히 떨쳐 버리고 '차이의 문화'를 지향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구자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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