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와 사람-박달예술인촌 화가들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넘는 우리 님아…'.

울고 넘는다는 '박달재'와 이름이 같아 이를 주제곡마냥 부른다는 박달예술인촌의 미술가들. 매달 넷째주 토요일 오후 열리는 정기 회의에서 '울고넘는 박달재'는 빠지지 않는 선곡이다.

박달예술인촌의 역사는 대구 달성군 다사읍 박곡리 야산자락에 있는 옛 서재초등 달천분교에 2000년 1월 7명의 작가들이 몰리면서 시작됐다. 배인호 당시 계명대 교수가 폐교를 분양받아 화가들을 모았던 것. '박'곡리의 '달'천분교라 이름은 '박달'로 지어졌다. 초창기 참여한 작가들은 배 교수 외에 김영태·유병수·배득순·이명재·김소하·박영숙 씨 등.

학교건물은 수도 시설을 정비하고 작업실로 개조하는데 시간을 좀 들이고 나니 꽤나 괜찮은 작업장으로 탈바꿈했다. 이명재 씨는 2003년 태풍 '매미'가 왔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태풍 때문에 나무들이 쓰러지고 운동장은 온갖 잡풀들로 엉망이 됐다. 청소작업하는데 한 달이 꼬박 걸렸다."는 것. 그래도 이때 쓰러진 나무들은 겨울에 땔감으로 요긴하게 쓰였단다.

찾아가는 길이 그리 멀지 않고 자연과 벗삼아 조용하게 작업할 수 있다는 점에 입촌하기를 원하는 화가들이 하나둘씩 늘기 시작했다. 개촌식 삼아 고사를 지날 때는 12명이 모였고 조각가 4명과 공예가 1명도 추가로 자리를 잡았다. 지금도 결원이 생기자마자 금방 충원이 될 정도로 인기있는 작업장으로 통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아무 작가들이나 들이지는 않는단다. "공동작업장이다 보니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과의 친화력을 최우선으로 본다."는 것이 회원들의 한결같은 말이다. 서로의 작업 공간을 무엇보다 필요로 하는 작가들인데다 정기 회의때 전기세며 수도세, 운동장 사용료 납부에 대한 논의도 오고가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같은 곳에 모여서 같이 작업을 하는 재미도 쏠쏠하단다. 서양화·동양화·도예·조각·디자인, 평면·입체 작업을 서로 참고하면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 고기를 구워 주변 텃밭에서 키운 농작물에 싸서 한 입 가득 넣어먹는 즐거움은 개인 작업실에 있으면 절대 맛볼 수 없는 기쁨이기도 하다.

16명이 모인 자리 명물이라면 명물이 없을 수 없다. 최고 인기는 단연코 조각가 박휘봉 씨다. 박씨는 거의 '밥담당'으로 통한다. 밥을 지으면 꼭 넉넉히 한 다음 작업하고 있는 다른 회원들을 굳이 불러들여 같이 먹기 때문. 조각 및 재료 수송을 위해 몰고 있는 트럭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땔감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몰고 가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겨울 모자라는 땔감을 구해 오는데도 요긴하게 쓰였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기거하는 도예가 윤기환 씨는 이 때문에 주말부부가 됐단다. 그래도 "작업하기 편하고 사람들이 좋다"는 것이 윤씨의 평이다.

박달예술인촌 회원들에게는 소원이 있다. 입촌한 첫 해 여름 주변 3개동의 학생들을 상대로 열었던 체험학습 교육을 계속하고 싶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미술과 친해지는 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주민들과의 유대감을 형성하는데도 큰 도움이 됐다. 반응이 좋았지만 경제적인 사정 등으로 작년에는 열지를 못했다. 회원들은 올해 다시 행사를 치를 예정으로 달성군의 지원을 받기 위해 노력 중이다.

미술인들을 위한 체계적인 지원이 부족한 현실에서 뜻이 맞는 '좋은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에게 기쁨과 힘을 주는 '작은 미술공동체'가 바로 박달예술인촌이었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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