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대구의 조선인 부자라면 경북농회부회장과 경북도 평의원을 지낸 이장우(李章雨)와, 그의 족친이자 시인 이상화의 백부인 이일우, 중추원참의를 지낸 서병조와 서병국, 시인 이장희의 아버지인 이병학, 그리고 정해붕과 정재학, 장길상. 직상형제 등을 꼽을 수 있다. 정재학과 장씨 형제는 나중 토지자본을 금융자본으로 바꿔, 은행경영에 몰두했지만 이장우만은 독보적이었다.
한말의 보병부위(副尉.중위)출신인 이장우는 칠곡 현감을 지낸 아버지로부터 본래 400석의 재산을 물러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 그가 20여년 뒤, 대구의 일인들로부터 "대구유수의 재산가"란 공공연한 평판에 이어, 조선인들 사이에서도 "2만석 거부"란 소문을 듣고 있었다. 이일우가 세칭 "3천석꾼"소리를 들었으니 이장우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가늠된다. 그 때와 요즘의 쌀 한 가마, 땅 한 평의 값을 단순 비교하기는 무리이다. 그러나 요즘 100억 원은 가져야 부자소리를 듣듯이, 그 때도 천석꾼은 되어야 부자 축에 끼었다. 따라서 이일우의 3천석은 요즘의 300억 원 부자쯤에 해당되며, 2만석이라면 2천억 원의 재산가라해도 틀리지 않는다.
당대에 무슨 수로 그만한 거부가 되었을까. 당시 사람들은 그가 친일세도가였던 박중양에 밀착하여 이권사업으로 거만금을 모았다는 소문을 정설로 믿었나 하면, 반대로 비록 한말의 끗발 있는 자리에 있었긴 했지만, 아무려나 400백석이 2만석이 될 수 있겠느냐며, 과장된 소문으로 치기도 했다.
서병조는 이장우의 재산에는 못 미치더라도 근검하고 선행을 많이 한 이일우 보다는 거부라는 소문이었다. 적어도 5천석, 최고 만석꾼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 역시 말년엔 적선도 적지 않게 했으나 참의벼슬에 앞서 고종 때 대구잠업전습소장직 등도 거쳐, 청부(淸富)의 반열에 넣기는 무리가 아니냐는 세평이었다. 그도 경상농공은행 취제역을 맡는 등 점차 금융업에 관심을 보여 갔다. 일족인 서창규, 서병원, 서병주, 서상현 등과 함께 조양무진(朝陽無盡)회사를 차린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금융업의 첫 단추는 장길상 형제가 끼웠었지만 경상합동은행 두취였던 정재학의 성공으로 금융업은 30년대 이후의 유망사업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남선경제일보 사장이며, 대구상의 부회두이던 한익동이 무진업에 뛰어들었고, 같은 대구상의원인 임상조, 허지, 진희태도 가세했다. 이에 뒤질세라 술도가와 정미소를 운영하던 추병화, 병섭 형제도 '돈 장사'에 한몫 거들었다.
그러나 남선양조장 사장 서병화나, 대구제일의 직물업자 김성재, 반월당 사장 차병곤, 무영당 사장 이근무, 곡상인 문유옥도 알부자였으나 한 우물만 파고 갔다. '삼성상회'와 '조선양조'를 경영하던 삼성그룹의 창업주 이병철은 1940년대 후반에 겨우 이름이 알려지고 있었을 뿐이다. 요즘도 정권에 고분고분 해야만 살아남듯, 일제하의 부자도 크든 작든, 자의든 타의든, 겉으론 친일을 않고는 못살아 남았다.
해방 후 이장우를 비롯한 대구의 지주들은 토지개혁 등으로 대부분 옛날의 영화를 잃었다. 또 은행이나 무진업자들도 일제의 패망에 따른 금융구조의 붕괴로 거의 대를 못 넘기고 큰 부자 반열에서 사라졌다. 일제하의 대구 부자들 중 이일우 집안만은 비록 재물은 갔어도, 그의 조카인 상정, 상화, 상백, 상오 4형제들이 떨친 용명으로 지난날의 명망을 이어갔다. 일찍이 열성으로 인제교육에 투자했던 결과였다. 그러고 보니 한 때의 부자란 지칭도 다 부질없고, 뭐니 뭐니 해도 재물은 '사람재물' 이상이 없다는 속설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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