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푸근한 이야기들

지난 연초 국내 한 업체가 시장에 갓 내놨던 새해 다이어리를 전량 회수했다. 그 일로 업체 측은 연간 총 매출액의 2.5%에 상당하는 손해를 입었다. 하지만 회수의 이유는 겨우 글자 하나가 잘못 인쇄됐다는 것이었다. 사소한 잘못도 흐지부지하지 않는 신선함이 듣는 이를 기분 좋게 하기 충분했다.

○…비슷한 시기, 서울 시민들이 서초구의 '우면산' 지키기 운동을 벌여 그곳 땅 980평을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 땅에는 어떤 정유회사가 저유소를 지을 계획이었다. 이에 시민들은 '우리가 매입해 산을 보전하겠다'며 3년 전 모금운동을 시작, 15억여 원을 만들었다. 서초구청이 17억 원을 보탰고 땅 주인인 정유사마저 12억 원 이상을 기부하기에 이르렀다.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의 한 사례인 이 일에는 무려 1만8천여 명이 동참했다. 초등학생부터 유명 기업인'법조인'음악인'방송인까지 마음을 함께했다.

○…지난 3월에는 중세적인 삶을 산다는 '사크' 섬 사람들 이야기가 들려왔다. 거기엔 자동차가 없고 포장된 도로가 없다. 현대적 교통 수단으로 경운기가 있긴 하나 한 번에 한 사람밖에 탈 수 없다. 치과의사도 없다. 영국 여왕 소유이지만 사실상 준독립 자치 지역이다. 의사 결정을 지주들이 도맡으니 봉건제 지구이기도 하다. 그러나 600여 명의 주민들은 이 봉건제를 더 선호한다. 최근 민주제가 도입됐으나 그건 '유럽인권협약'이라는 외부적 요인 때문일 뿐, 주민들은 시큰둥하다. 그들은 느긋하고 평화롭게 산다.

○…4월 들어서는 '100세 장년' 이야기가 이어졌다. 일본에서는 100세 된 수학자가 논문을 발표해 화제가 됐다. 6년간 프랑스어로 썼다고 했다. 미국으로부터는 105세 최고경영자의 활기 찬 시장 개척 뉴스가 날아들었다. 운영하는 회사가 서부 개척시대 복장 전문업체이며 그의 애칭이 '파파 잭'이라는 얘기가 특히 편안한 느낌을 갖게 했다. 그러던 중 라면 발명자인 일본의 97세 된 현역 최고 경영자가 우리나라를 찾아 '건강의 비결은 소식'이라고 훈수했다.

○…팍팍한 세상에서 푸근한 뉴스를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그 주인공들은 우리로 하여금 잊어버린 또 다른 삶을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지방선거 등등으로 더 살벌해진 세태, 상궤를 지키고 상대를 끌어안으며 살 줄 아는 지도층을 보고 싶다.

박종봉 논설위원 paxkore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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