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현재, 한미 FTA협상 등에 따른 쌀시장 개방문제로 떠들썩하다. 쌀이 많이 남아돌아 소비촉진행사가 열리고 농촌살리기 운동과 식량주권 지키기 운동 등으로 쌀문제가 거론되고 있지만 불과 35년 전만 하더라도 쌀밥을 먹는다는 것은 '실현되지 못할 꿈'과 마찬가지였다.
1966~1970년 연간 쌀 수입량 33만t은 정부 비축미의 53%. t당 쌀수입가는 400달러선으로 수입가가 1억 3천만 달러가 소요돼 당시 수출총액 10억 달러의 13%나 차지했다. 때문에 정부는 쌀의 자급을 위해 토지의 단위 수량을 높이는 데 주력, 공무원을 내세워 농민들을 독려했다.
이때 개발된 것이 '통일벼'였다. 녹색혁명으로 일컬어지는 이 통일벼의 개발은 쌀의 ha당 수확량을 4t에서 5t으로 20%나 높이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녹색혁명이 순조롭게 시작된 것은 아니다. 농촌진흥청이 개발한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에 대한 농민들의 인식은 그야말로 불신 그 자체였다. 1972년 4월 농촌에서는 통일벼 보급운동에 내몰린 공무원과 이에 대한 불신으로 기피하는 농민들의 숨바꼭질이 연일 계속되면서 들녘 곳곳에서 마찰이 빚어졌다.
읍·면·동사무소 직원들은 담당 마을별로 나가 통일벼 볍씨를 물에 담가 싹이 트도록 하는 한편, 못자리 설치를 위해 물에 담가둔 일반벼 볍씨를 강제로 엎어버리는 등으로 통일벼 재배 확대에 강제동원됐다. 당시 도로변에는 무조건 통일벼를 심어야 했다. 일반벼를 심은 논이 상부기관에 발각되면 담당직원은 바로 문책을 받았기 때문이다. 전체면적의 20%가량 보급됐던 통일볍씨 대부분이 도로변이나 눈에 잘 띄는 논에 심었다고 당시 공무원들은 전하고 있다.
농가 85호가 살았던 상주 내서면 평지1리를 담당했던 상주시 이정수 세정과장(당시 내서면 산업계 근무)은 "현지 씨나락 검사를 나가면 통일볍씨만 살짝 보여주고 정작 일반볍씨는 다른 곳에 숨겨두기도 해 이를 찾아내 엎고하는 과정에서 숱하게 멱살잡이를 당했다."며 "하지만 국책사업이어서 욕설과 손가락질을 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반 강제로 통일볍씨를 사용할 것을 강요해야 했다."고 말했다.
당시 '면서기'로 불리던 공무원들은 골짜기마다 설치된 못자리를 일일이 찾아가 볍씨가 일반벼인 지 통일벼인지를 확인하는가 하면 통일벼의 못자리 면적 등을 대장에 일일이 기록했다. 또 못자리 덮개 비닐에 유성팬으로 벼싹의 길이와 면적 등을 표시해 두고 생육과정을 철저히 살피는 등으로 통일벼재배 감시 및 지도에 총동원됐으며 통일벼 재배 면적과 수량을 일일 보고하기도 했다.
상주시 김인훈 농정과장(당시 상주 화서면 산업계장)은 통일벼로 인해 농민들이 세번 놀랐다고 했다. "다 자라도 잎이 커 나락이 보이지 않아 이삭이 없다고 아우성을 치면서 처음 놀라고 두번째는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삭이 굵고 튼튼해서 또 놀랐고, 세번째는 수확 후 탈곡해보니 일반벼보다 많게는 두 배 이상 소출이 나서 놀랐다."고 전했다.
이정수 과장은 "600평의 논에 일반벼를 심은 60세 노인은 화가 나서 쟁기로 논을 모두 갈아 엎었고 오랫동안 원수처럼 지냈으나 통일벼의 수확이 높자 사이가 좋아졌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보급 첫해인 1972년은 실패로 나타났다. 출수(出穗)가 되지 않거나 볏대가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일어나는 심각한 현상이 나타나면서 벼가 이삭조차 피우지 못한 것이다. 당시 폐농한 농민에 대해서는 정부가 농지세를 깎아주는 등 보상을 했지만 '정부가 시키는 반대로 농사 지으면 성공한다.'는 말이 농민들 사이에 유행어가 됐다.
그러나 1973년에 보급된 품종 '대풍'이 명실상부한 다수확 품종으로 인정받으면서 농민들은 앞다퉈 통일벼 재배에 나섰다. 김인훈 과장은 "농협과 농촌지도소, 면사무소에서 지도하는 대로 벼를 재배하고 수확하는 방법으로 300평당 최고 600~700kg을 생산했다."며 "정부 수매 과정에서는 보관할 양곡창고가 없어 마을회관과 공동창고에 쌓아두고 보관증을 받으면서 농가 마당에 쌓아두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농가소득이 증대되자 농촌마을마다 쌀 다수확농을 중심으로 TV 등 가전제품을 구입하는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농촌에 흑백 TV가 있는 집은 겨우 1, 2집 정도에 그쳐 밤마다 온 동네 주민이 TV 앞에 몰려드는 진풍경이 벌어졌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 웬만한 가정은 모두 TV를 갖게 됐다.
이 녹색혁명은 1975년부터 '유신' '밀양23호' '수원264호' '노풍' 등 잇단 통일벼 신품종이 개발, 보급되면서 1975년 3천242만 섬, 1976년 3천596만 섬에 이어 1977년에는 4천170만 섬을 넘어서 사상 처음으로 연간 쌀 수확량 4천만 섬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황재성기자 jsgold@msnet.co.kr 상주·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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