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람과 삶]'하이마트 음악감상실'김순희씨

오늘 오전은 치과에 다녀오는 바람에 조금 늑장을 부렸다. 그래도 30여 년을 하루같이 지탱해온 음악감상실이라 오늘도 건너뛸 일이 없다. 김순희(60·여) 씨는 전축실 낡은 문을 삐거덕 연다. 턴테이블 앞에서 잔잔하게 미소를 보내는 아버지의 초상화에 자연스레 눈길이 간다. 37년 전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지만 오늘은 왠지 김씨의 가슴 깊이 그분의 잔상이 파고든다. 문득 김 씨는 세월만큼이나 누렇게 뜬 1천여 장이 넘는 LP판 중에서 한 장을 빼내든다. "생전에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시던 베토벤 심포니 6번 '전원'이예요." 켜켜이 어둠이 쌓인 음악감상실의 침묵은 한 순간에 깨어진다.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는다. 음악에 실린 아버지와의 추억을 음미하는 것일까.

김 씨는 대구 공평동에 위치한 '하이마트(Heimat) 음악감상실'을 운영하고 있다. "한때는 이걸로 벌이가 안 되니까 주위에서 장사를 해보라는 소리도 많이 했어요. 사실 갈등도 무척 많았죠." 하지만 그녀는 끝내 음악감상실을 포기하지 못했다. 아버지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아버지 김수억 씨가 구 대구극장 자리에 하이마트를 연 건 1957년. 한국전쟁 피난 당시 대구로 내려온 아버지는 남다른 음악 사랑으로 '녹향 음악감상실'을 자주 가곤 했다. "아버지는 고향인 서울에 올라가 음악감상실을 차리려고 마음먹고 있었죠. 하지만 여건이 안 돼 결국 대구에서 '하이마트'란 이름으로 음악감상실을 열었습니다." 당시 김 씨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미국에 살던 이모를 통해 음반을 구했다. 음반 카탈로그를 보고 명반을 골라 이모에게 부탁하면 이모가 미국의 대형 음반점에서 음반을 사서 안면이 있는 주한미군 장교들 앞으로 보내는 식이었다. "아버지가 음반을 미군에게서 찾아오는 날이면 음반에 뽀뽀를 하면서 하루 종일 계속 듣곤 했죠. 너무 고생을 해서 얻은 거니까요." 그렇게 하나둘씩 모인 음반은 당시 한옥집 통나무 책장에 꾸역꾸역 쌓였다. "얼마나 많이 모였던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마룻장이 꺼지기까지 했죠. 그래서 어머니 잔소리가 심했어요."

김 씨가 고등학교에 올라가자 본격적인 하이마트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한날은 주말마다 교복 칼라를 깨끗이 다려 입고 하이마트로 나오라고 하더군요. 그때부터 궂은 일이 시작됐죠." 매주 주말마다 김 씨는 하이마트를 찾아 걸레질을 해야 했다. 그 일을 마치면 전축실에서 바구니에 수북이 쌓인 신청곡을 보고 음반을 찾아 칠판에 적는 일을 했다. "그땐 너무 힘들었죠. 마치고 나면 비지땀이 줄줄 흘렀어요. 그래도 하늘 같은 아버지였기에 불평 한 번 못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한창 친구도 만나고 데이트도 할 시기지만 주말 자유시간이라곤 일절 없었다. 여름에 그 흔한 해수욕장도 아직 못 가봤단다. 하지만 핑계를 댔다가는 냉랭한 아버지의 얼굴을 오랫동안 접해야 했다. "원망도 없진 않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한참 뒤에 저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싶어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너무 늦게 말이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날 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자신이 없더라도 하이마트를 계속 이어가라고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옆에 있던 김 씨가 거들었다. "걱정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비로소 아버지의 입가엔 미소가 그려졌다. 김 씨를 와락 끌어안으면서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그 당부는 결국 김 씨가 지금까지 하이마트를 지키는 힘으로 작용했다.

이젠 환갑인 김 씨의 뒤를 이어 큰아들인 박수원(35) 씨가 하이마트를 지탱하려고 한다. 김 씨 몰래 4년간 음악 레슨을 받았던 아들이었다. 누구보다 할아버지의 뜻을, 어머니의 뜻을 알기에 그럴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올 8월에 프랑스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오는 아들을 기다리는 김 씨의 모습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3대에 걸친 음악에 대한 애정은 클래식처럼 아름답게 다가왔다.

전창훈기자 apolonj@msnet.co.kr 사진·정재호편집위원 new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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