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꿈엔들 잊힐리야

꿈엔들 잊힐리야/ 김열구 글/ 황헌만 사진/ 호영출판사

'우리네 시골 마을은 모두의 고향이다. 그곳은 우리 개인의 삶의 텃밭만이 아닌 한국인 누구나의 삶의 터전이요, 문화의 기틀이기도 하다. 마을은 우리의 집단적 의식과 무의식의 모태이다. 고향은 그렇게 우리의 인성과 문화를 동시에 한 태(胎)에서 길러낸 것이다. 고향은 그리움의 대상이기 이전에 우리 한국인의 문화와 뿌리이다.'

한국문화의 원형을 찾아 평생 외길을 걸어온 원로 학자 김열규 전 서강대 교수가 풀어내는 곰삭은 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 이 책은 한국인의 정서를 정갈하게 담아낸 신귀거래사(新歸去來辭)이다.

할머니 무릎을 베고 들었던 정겨운 옛이야기며, 뒤뜰 장독대에 정화수 떠놓고 어머니가 풀어내던 맵짠 인생살이에 겹쳐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고향의 풍경들이다. 시골길과 장터, 징검다리, 샘터, 개울, 물레방아, 서낭당....

아련하고 애달픈 그러나 정겨운 것들. 어찌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그래서 고향 마을 가까이에 새 보금자리를 틀고, 고희를 넘긴 이제사 펜보다 호미를 쥘 때가 더 많다는 그가 나지막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길어내 전하는 귀거래사.

김열규가 이렇게 귀거래사를 부르는 까닭은 무엇일까. 왜 그는 사라져가는 고향을 다시 노래하는가. 숨가쁘게 달려온 세월. 실향이든 출향이든 객지에서 떠돌다 다시 찾은 아니, 꼭 찾아가야 할 고향, 어머니의 따스한 젖가슴 같은 그런 고향에 돌아가자는 것이다.

'술은 묵힐수록 맛을 낸다. 김치도 곰삭아야 하고 된장도 간장도 곰삭아야 제 맛과 향을 낸다. 세월도 인정도 물정도 마찬가지다. 정도 사랑도 곰삭고 익어야 한다. 고향의 옛정, 그 묵은 정이 이제 우리를 부르고 있다. 우리들 떠나 있던 그 세월의 길이만큼, 마음 속에서 익고 우리들 영혼 속에서 농익었을 고향이 이제 우리들 나그네더러 돌아오라고 한다'

저자의 귀거래사는 이렇게 계속된다. '산바람이 맞아 반기는 곳, 개울물 소리에 귀가 절로 열리는 곳, 그곳이 고향이다. 앞산 마루의 해돋이 따라서 희망이 부풀었고, 서산마루의 노을 빛 따라서 꿈은 둥지를 엮었다. 보리 익어가는 내음에 여름이 짙어갔고, 벼 익는 기척에 가을이 깊어갔다. 늦가을 수수이삭이 고개숙인 곁에서 우리들 생각에는 만만찮은 무게가 실렸다.'

저자는 릴케가 대도시를 허위라 하고 기만이라고 부른 그 따가운 외마디가 가슴을 파고든다. 드넓은 세상을 향해 고향을 떠나온 도시인들의 발걸음이 이제 절룩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도시의 시민 태반이 상처가 아닐까.'라고 되묻는다.

김 교수는 책 말미에서 "한류(韓流)를 통해 자기 치유의 비책을 찾으라"고 한다. 지극히 한국다워야 알뜰히 우리다워야 남들이 소리지르며 반긴다는 것을..., 김치가 세계화되었다면 김칫독과 장독대도 장독대 있는 뒤뜰과 앞마당가의 배추밭도 되새겨보라고 한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의 품이기도 한 집과 고샅과 샘터며 뒤동산도 되짚어보라고 한다. 그는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이같은 옛정의 되짚어 봄이 옛 물정의 되살림이, 이제 글로벌리즘 시대의 슬로건이 되고 로고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간절히 전한다.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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