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9일 '수요시평'에 소개된 '영남대 재단 정상화'에 대한 글의 내용 중 1988년 영남대의 국정감사는 주로 재단 부정과 입학 비리를 척결하기 위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 감사에서는 학교 성립과정에서의 권력의 비리와 정체성이 도마에 올랐다.
그렇다면 문제의 경중(輕重)으로 보아 당연히 이 정체성의 문제가 경영상 하자보다 우위를 차지하지 않을까. 교육부(사립대학 지원과)가 이제 영남대의 '정상화'를 추진하게 되었다면, 이런 도의적 차원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학교 구성원, 재산출연자 및 학교발전에 기여한자 등, 이해관계인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그 방안을 연구하도록 하라면서, 설립자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이것이 영남대 정상화 추진을 둘러싼 현재의 상황이다.
영남대의 전신중 하나인 청구대학은 1950년에 4년제 대학 인가가 난 이래 1966년 말까지, 18년 동안 야청(也靑) 최해청 선생이 창설자이자 구심점이었다. 그가 필생의 사업으로,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학교였다.
1967년 6월 신축중이던 교사가 붕괴하자 당황한 당시 운영자들이 설립자에게는 일언반구없이 노산 이은상씨를 중개로 청와대에 진상했다. 당시 주역들도 지금은 그 행위의 잘못을 반성하고있다.
대구대학은 설립후 우여곡절끝에, 그해(1967년)에는 삼성 이병철 사장의 손에 있었으나, 마침 '사칼린 밀수사건'의 속죄로 자진 상납했으니, 청구대학과는 경우가 다르다. 하여튼 이것을 기화로 당시 청와대에서는 박 대통령 퇴임 후의 안식처로 영남대를 만들었다.
이 권력에 의한 통합을 두고 당시 매일신문은 사설에서 여러차레 회의와 의구(疑懼)를 특필했고(1967년 12월), 야청의 애타는 박정희 대통령 면담 요청은 무산됐다(한 때는 박 대통령이 야청을 고향 선배로 예우하고 자문하던 사이었음).
정보부는 공갈협박까지 했다. 이런 지경에서 야청은 1977년 한을 품고 타계했다. 겨울공화국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그러나 민주개혁의 움이 트면서 영남대의 정상화 추진도 거론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남대 '정상화' 시도는 아직 옳은 괘도를 찾지 못하고 있다.
지금 정상화 수습에 나선 사람들부터가 이미 그 당시 사안에 대해 잘 아는 연배가 아니다. 그러다보니 그 때의 사(事)와 정(情)이 마음에 닿지 않는다. 거기에다 그들은 그 자리에 임시로 앉아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1988년 국정감사 후에도 줄곳 '왕립대학'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고, 지난해에도 국회에서는 '교주 박정희' 문제가 대두되지만, 지금 교육부 해당과나 임시이사회 사람들에게는 거의 듣지 못한 이야기들이다. 이래서야 정의가 살아있는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지난날 심혈을 기울여 그 학교를 세운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염치를 아는 제일보라 하겠다. 민족의 장래는 학생들에게 도의를 가르치는데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영남대의 '정상화'는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어야 할까. 과연 어떤 방안이 지역의 미래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올바른 것인가.
최찬식(야청선생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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