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 신목근통신(新木槿通信)

반세기가 지난 오늘 다시 '목근통신'(木槿通信)을 읽어야 하는 마음이 장마철 먹장구름 같다. 목근통신(무궁화통신)이 무엇이던가. '가난한 날의 행복'으로 널리 알려진 수필가 김소운이 1951년에 발표한 일본인의 모멸과 학대에 대한 민족적 항의를 담은 서간체 수필이 아니던가.

일본인의 오만과 편견을 통렬히 비판한 것으로, 한국전쟁의 와중에 출간된 목근통신은 일본잡지 주오고론(中央公論)에 번역 소개돼 일본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목근통신'이 재출간되고 우리가 다시 읽어야 하는 것은, 목근통신의 메시지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방증이다.

작가는 당시 일본 식민통치의 잘못과 그로 인해 빚어진 참담한 일들, 그리고 패전국 일본이 보여준 참회의 여부와 그 진실성을 낱낱이 지적했다. 그런데 50년도 더 지난 올 여름 우리는 고미즈미 일본 총리의 8.15 야스쿠니 신사 참배설을 두고 똑같은 화두에 빠져있다.

시나브로 독도 영유권을 강변하며 툭하면 망언을 내뱉는 일본과의 신경전도 변함이 없다. 간교한 일본인의 속성과 일본사회 내부의 허위의식을 비판하면서도, 일본을 객관적으로 바로알고 그들의 장점을 배우자고 했던 목근통신의 해묵은 목소리에 또 귀기울여야 하는 현실이 차라리 역겹다.

얼마전 눈여겨 보았던 강우석 감독의 영화 '한반도'의 장면이 떠오른다.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고종황제를 독살하는 그때의 참상과, 일본 외상이 청와대에서 한국 대통령에게 호통을 치는 오늘의 비극.

한 민족의 정신적 체질은 50년, 백년이 지나도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더니.... 원심과 구심, 거시와 미시가 얽히고 설킨 한·일 두나라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참으로 암담할 따름이었다.

도대체 우리는 무슨 업보(業報)로 지구상에 둘도 없는, 저리도 별난 종족과 이웃하게 되었던가. 한국의 미제라블(悲劇)은 한국의 수치이기 이전에 바로 자신들의 비인도(非人道)와 정치악(政治惡)의 바로미터였음을, 결국은 스스로의 불행임을 모르는 저 삼도(三道)의 왜적(倭敵)과.... 할 수만 있다면 땅덩어리를 몽땅 싣고 멀리 이사라도 가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중국대륙이 일본문화의 어머니였다면, 한반도는 알뜰한 무상(無償)의 유모(乳母)였다. 그 은의에 대한 열도(列島)의 보답은 무엇이었던가. 모토(母土)에 대한 난자와 능욕이 아니었던가. 긴 세월 저질러온 온갖 죄업과 어머니같은 이웃나라의 뼈속 깊이 새겨놓은 증오에 대한 반성은 커녕 적반하장(賊反荷杖)의 악업(惡業)만 되풀이하려 드는 저 패륜적 집단에 무엇을 더 기대하랴.

결국 현해탄에 가로놓인 숙명적인 구원의 장벽을, 한·일간에 서려있는 어두운 안개를 걷어내야 하는 일은 역설적으로 피해자인 우리의 숙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따지고 보면 똑같은 과오를 거듭해온 우리의 업보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 겨레는 갈라지고 국론은 분열되고..., 정녕 사무치는 울분을 한번도 제대로 터트려보지 못한채 제 가슴을 제 손으로 쳐야 하는 이 모진 현실이 목근통신을 다시 읽게 한다. 삼복더위보다 더 후텁지근한 갑년(甲年) 8.15를 앞둔 우리의 자화상이....

조향래 기자 (문화부)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