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교문을 드나들던 코흘리개 시절을 회상하면 숙제 걱정에 종종거리던 일이 먼저 떠오르고, 연이어 교과서 대여섯 권보다 더 두껍던 전과지도서가 기억의 창고에서 걸어 나옵니다. 어떤 어려운 숙제라도 확실한 해답을, 아니 너무 확실하고 정확한 해답을 펼쳐 보여 베껴 쓰기가 미안스럽기까지 했던 그 전과지도서 말입니다.
당시 국어 숙제의 단골 메뉴는 글을 읽고 어려운 낱말을 풀이하거나 줄거리쓰기, 문단나누기따위였는데, 이런 골치 아픈 숙제를 대부분 전과지도서에 의지하다 보니, 그 다음날 국어 시간 풍경이 가관이었지요. 한 아이가 글의 줄거리를 발표하면, '저 녀석은 동하전과를 가지고 있구나.', 또 한 아이가 문단 구성에 대해 이야기하면, '어 친구는 포준전과를 베껴왔네'라고 아이들끼리 쑥덕거렸으니까요.
요즘 우리나라 교육계의 기상징후는 단연 논술 광풍입니다. 최근 대학들이 2008학년 대학입시부터 논술 비중을 높이겠다고 발표하자 논술이 사교육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돈이 끓는 곳에 돈파리가 끓듯이 3~5년 후에는 수조 원대로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 이 논술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세계적인 투자펀드회사들까지 군침을 흘리며 몰려온다지요. 2~3년 전부터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논술학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더니, 이젠 유아 논술학원까지 등장하여 심지어는 임산부가 뱃속의 아이를 유명논술학원의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는다니 광풍도 이만저만한 광풍이 아닙니다.
범박하게 말해서 논술의 핵심은 논증이며, 논증은 논리 정연하게 생각하는 힘입니다. 논리적 사고력이 논술의 기본이며, 이 기본기는 비닐하우스 속에서 상추를 기르듯이 촉성재배 방식으로는 결코 길러지지 않습니다. 평소 교과 수업시간에 그 교과에 내재하는 논리를 깊이 있게 꾸준히 가르쳐야 한 켜 한 켜 쌓이는 고급 능력입니다.
골목마다 앞을 다투며 간판을 내거는 논술학원들이, 논술시험에서 점수를 잘 받아낼 수 있는 전략 또는 요령이나 가르친다면, 글에 대한 논리적 사고 기회를 박탈하고 정답부터 일러주던 그 옛날의 전과지도서와 다를 바 없겠지요. 그리고 이런 학원에서 배운 학생들의 대입논술 답안지를 보면 '이건 A학원 스타일이구나.', '이 학생은 C학원을 다닌 게 틀림없어.'라고 중얼거리며 채점관은 또 싹둑싹둑 점수를 깎아내릴 겁니다.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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