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358년 역사가 흐르는 대구약령시의 중심인 약전골목은 한가위를 맞아 서둘러 고향으로 떠나간 이들로 인적이 끊어졌다. 네온사인이 꺼지고, 자동차마저 자취를 감춰 고요가 내려앉은 한밤 중의 약전골목을 걷노라면 '텅빈 충만'을 느낀다.
내일(6일)이면 추석인 저 보름달 때문일까? 아니, 가득차서 오히려 무거워보이는 만월 때문은 아니다. 일상에 좇겨, 혹은 너무 가까이 있어 소홀했던 역사의 현장이자 개신교 성지인 대구제일교회 구교회와 그 맞은편에 자리한 대구YMCA 초기회관에서 뿜어져나오는 기(氣) 덕분이다.
3.1 운동 전후로 나라를 되찾으려했던 주의 종들의 안식처였던 구(舊) 대구제일교회, 젊은이들이 모여 복음전파와 민족갱생의 길을 모색했던 대구YMCA 초기회관은 아베 신조 신임 일본 총리 취임 이후 급박하게 돌아가는 일본 정세와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는 대구 개신교의 중요성지이다.
◇ 이갑성이 찾아오다
대구 3.1운동이 터지기 한달 전인 1919년 2월 4일,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이갑성이 지역 개신교계의 리더였던 이만집을 찾아왔다. 이만집은 남성정교회(대구제일교회 전신) 목사이자 계성학교 첫 한국인 교사였으며 교남기독교청년회(대구 YMCA 전신) 회장이기도 했다. 같은 대구 출신으로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한 이갑성은 개신교 16명, 천도교 15명, 불교 2명으로 구성된 3.1운동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1명(개신교인)으로 경상도와 서울의 연락을 맡았다. 이갑성은 파리강화회의, 동경 유학생 만세운동, 국내 만세준비 등을 설명하며, 계성학교, 신명학교, 교남기독청년회(대구YMCA 전신) 등을 움직여, 독립운동에 동참해달라고 호소했다. 이만집은 독립에는 찬성이었지만, 그에 따른 민중과 교회의 희생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 고난에 좌절치 말게 하소서
이갑성의 경신학교 후배인 최재화(이만집 다음으로 제일교회 담임목사 역임, 벽돌한장사기운동으로 현재의 대구제일교회 구교회 건립)가 다시 부탁을 받고 이만집을 찾아가 동참을 호소했다. 한참 고민하던 이만집은 드디어 결심했다. "젊은이들이 나라를 위하여 일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니 함께 노력합시다." 남성정 교회 담임목사를 차례로 역임했던 이만집과 최재화는 주님의 뜻과 권능에 따라 독립운동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아버지 하나님, 시련속에서 자유를 갈망하오니 고난이 와도 좌절치 말게 하시고,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주신 것처럼 이 민족을 구하여 주옵소서. 우리에게 모세의 지팡이를 주시고, 민족을 위해 일어난 이 나라 젊은이들에게 힘을 주옵소서."
◇ 손병희와 함께 최장 3년의 옥살이
1919년 3월 8일. 계성학교, 대구고보, 신명학교, 교남학교(대륜고 전신) 학생들과 시민 7백여명이 서문시장에 모이자 이만집이 연단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불렀다. 나라 잃은 지 10년, 목청껏 독립만세를 부른 감격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검거 선풍이 불어닥쳤다. 남성정 교회 담임목사이자 대구 3.1운동을 주도한 이만집은 징역 3년, 남성정 교회 김태련 조사(helper) 2년6월, 신정(현 서문)교회 정재순 목사, 계성학교 김영서 백남채 김무생 최상원 각 2년 등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특히 이만집은 손병희와 함께 3.1운동으로 최고형(3년)을 선고받아 고통을 감내해야했다. 이만집이 근무하던
◇ 사도 바울처럼 영적 자유 누려
"육신은 고통스러워도 영적으로는 무한히 자유로웠습니다. 옥에 갇힌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기뻐하고 기뻐하라'고 한 영적 풍요로움과 자유를 감옥생활에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고통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은 것은 축복입니다." 아들 이성해(계성고보 5년)과 함께 징역을 살던 이만집은 밥을 젊은이들에게 나눠주며 사랑을 실천했고, 의연하게 견뎌나갔다. 출소 후에도 자신의 행동을 결코 과장하거나 떠벌리지 않은 겸손한 목회자였다. "뭐 나만 겪었나? 모두 다 당한 것인데... 모든게 하나님의 은혜지." 겨레의 앞날을 걱정한 민족주의자이면서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려는 신앙인의 근본 자세를 잃지 않았다.
◇ 출옥 후 자치 파동에 휩쓸리다
1919년 부터 1921년 봄까지 만 2년 옥살이 끝에 출감한 이만집 목사는 설교와 심방을 통해 흩어진 남성정 교회 교인모으기에 주력했다. 은혜를 사모하는 교인들로 교세가 꾸준히 늘고 있던 차에 때 아니게 자치파 파동이 터졌다. 분쟁의 발단은 계성학교 학생들의 동맹 휴학사건(1921년 5월 29일부터 6월 2일)과 남성정 교회 투서사건이었다. 계성학교 학생이 곧 남성정 교회 교인이기도 한 현실에서 이만집 목사는 조용하게 해결되기를 바라는 온건파였다. 투서가 못마땅해도, 젊은이들의 앞날을 생각하여 처벌보다 교화 쪽을 택하면서 무난하게 마무리되기를 바랐으나 뜻대로 되지 않고 결국 둘로 갈라졌다. 1923년에는 선교사 중심의 경북노회에서 탈퇴하여 자치선언을 하게 됐다.
◇ 금강산 수양관
남성정 교회를 노회파에 넘겨주고, 독립교회 형태의 봉산교회를 세워 5년간 시무하던 이만집은 중국 사람들조차 한번 보고 죽으면 소원이 없다고 할 정도의 명승인 금강산에 수양관을 세웠다. 장안사 맞은편에 세워진 이만집의 수양관은 일제의 신사참배를 피해 신앙을 지키려는 교회 지도자들의 안식처가 되기에 충분했다. 분단으로 현재의 상황을 알아볼 길이 없어 안타까운 금강산 수양관은 개신교인들이 맘껏 신앙생활을 하던 자유로운 곳이었다. 해방 한해 전인 1944년 7월 1일, 이 땅 기독교 역사와 민족독립에 큰 자취를 남기고 소천한 독립운동가 이만집에 대한 재평가 작업, 필요하지 않을까?
최미화 편집위원 magohalmi@msnet.co.kr 사진 정우용기자 v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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