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광장] 희망인가, 기망인가

지난주, 평소 존경하던 선배 교수님의 고별강의가 있었다. 강의 말미에, 우리 사회의 처지를 빙산과 충돌하기 직전의 타이타닉호에 비유했다. 여기서 혼자 살겠다고 배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같이 힘을 모아서 배의 방향을 돌리는 것, 그것만이 우리들의 살 길이다'라는 말로 강의를 끝맺었다.

독자들은 마지막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침몰 직전의 타이타닉호를 우리 현실에 비유한 것에 대해 수긍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는 오히려 그 분의 이야기에 공감한다. 지금은 거짓된 희망을 노래하고 기만적인 희망을 부추길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절망적인 현실을 직시할 때라고 생각한다.

병도 그렇지 않은가? 병이 위중하면 위중할수록 무슨 병에 걸렸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아무 것도 아니야'·'내일이면 좋아질 거야.' 그렇게 거짓 희망으로 환자를 속이면 안된다.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속여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들고 대책 없이 죽게 만들어서 안된다.'

환자이면 자기 병을 정확히 알아야 하고 그에 걸맞은 강인한 투병생활을 각오해야 한다. 그것만이 살길이다. 환자이면서도 환자인 줄 모르고 환자가 아닌 것처럼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별짓 다 해서는 살 길이 없다. 환자면 환자답게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정말 우리가 얼마나 지독한 병에 걸려있는지 모르고 있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목전에 펼쳐지고 있는 현실, 정치도 경제도 교육도 사회도 그 어떤 것도 깊이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 우리 모두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바닥을 알 수 없는 늪에 빠진 것 같기도 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에 들어선 것도 같기도 하고, 또 언제 어디에서 곤두박질할지 모를 탈선열차에 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 모두 그런 짙은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절망적 현실을 인정하기 싫어한다. 절망이라는 소리 자체를 끔찍이 싫어한다. 그것은 절망적인 처지를 몰라서가 아니다. 그것을 인정하기 싫고 고통스러운 노력을 회피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어떻게든 고통스러운 노력을 하지 않고도 좋아지기를 바라는 그런 요행심리를 떨칠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미래에 희망을 걸고자 하는 것,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질 거야'라는 믿음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지금으로서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나아질 것도 좋아질 것도 없는 줄 번연히 알면서, 그리고 나아지고 좋아질 수 있는 그만한 어떤 노력과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공허한 희망, 거짓된 희망을 앞세우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기망(欺罔)이기 때문이다. 이 모양 이대로 살다가 그냥 망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렇게 자신을 속이기보다는 차라리 절망적 처지를 직시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문제가 있는 곳에 해답이 있게 마련이고 호랑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그러나 병을 속여서는 길이 없다. 그리고 병을 안다면 지독한 병에 걸린 환자답게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을 감수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렇게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중지(衆智)를 모으고 뜻을 모아야 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희망을 말할 수 있다.

얼마 있지 않아 2006년의 마지막 달력 한 장이 떨어질 것이고 우리는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신년의 희망'을 이야기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태양신도처럼 동해바다로 몰려갈 것이고 신문과 방송에서는 동해 바다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화려한 사진으로 담아내 보낼 것이다.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그러나 동해바다에 희망이 있겠는가? 1월 1일의 태양에 희망이 있겠는가?

스스로 만들고 준비하지 않으면서 희망을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그만큼만 희망을 말할 수 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인과의 기본, 우리가 모르지 않는다. 내일은 준비하는 자의 몫이다. 희망은 준비하고 있는 자의 노래일 뿐이다.

배영순(영남대 교수·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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