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맨스랜드'의 다니스 타노비치가 연출한 '랑페르'는 고인이 된 거장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각본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지옥이라는 제목답게 '랑페르'는 삶이 어느 순간 지옥으로 변하는 지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레드, 블루, 그린이라는 세 가지 색을 테마로 조형된 여성인물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각각 지옥을 지나치느라 전전긍긍 중이다.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메디아'를 근간으로 진행되는 이 이야기는 복수, 사랑, 가족과 같은 오래된 존재론적 문제들을 건드리고 있다. 그렇다면 '메디아'는 어떤 내용의 희곡인가? 메디아는 부정을 저지른 남편 이아손에게 복수하기 위해 손수 자신의 자식들을 죽인 그리스 신화 속 악녀의 이름이다.
'랑페르'의 갈등 역시 남편과 아내, 아이들로 이루어진 가족 안에서 발생한다. 첫째, 소피는 성공한 사진작가의 아내이지만 자신을 외면한 채 부정을 저지르는 남편으로 인해 괴롭다. 그녀는 남편의 뒤를 밟고, 그의 정부의 사진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처참한 상황을 악화시켜 나간다. 돌아오라고 몸부림치고, 애원해도 멀어지는 남편을 보는 소피에게 남편에게 남아있는 사랑이나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은 고통이자 아픔이고 비극이다. 하루하루 눈을 떠 살아가는 것 자체가 그녀에겐 지옥인 셈이다.
한편 막내 안느는 가장 친한 친구의 아버지이자 스승인 교수와 사랑에 빠져 있다. 새삼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녀를 버린 후 돌아간 남자를 잡기 위해 안느는 한 가닥의 자존심마저 버리고 다가선다. 임신 테스트 결과를 편지 봉투에 끼워 전달하고 심지어는 그의 집에까지 찾아가 유부남을 사랑하고 있다며 친구와 친구의 어머니에게 털어 놓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돌아선 남자의 마음은 돌이켜지지 않고, 잠도 못자고 밥도 못먹는 처참한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마지막 인물인 둘째 셀린느 역시 마음을 닫고 고독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세자매의 불행한 삶이 실상 과거의 사건으로 인한 충격과 상처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이다. 그 사건은 바로 교사였던 아버지가 남학생을 성추행한 사실과 그 사실을 경찰에 고발한 어머니로부터 비롯된다. 하지만 훨씬 더 충격적인 사건은 아버지의 출감 후에 발생한다. 아이들에게 결백을 고하고 싶다는 아버지를 어머니는 끝내 허용하지 않는다. 폭력적으로 집안에 돌입한 아버지는 아이들마저 그를 거부하자 창밖으로 뛰어내려 자살하고 만다.
머리가 찢어진 채 쓰러져 있던 어머니와 자살한 아버지의 잔영은 세 자매의 삶에 불행을 드리운다. 그 불행은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깊은 운명적 자상을 남기고 만다. 마치 어머니처럼 남편을 내쫓는 첫째딸이나 친구의 아버지에게 이성애적 감성을 키워온 셋째딸이나 아버지의 부재와 흔적 속에서 갈등하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 속에서 유머를 찾아내는 데 탁월한 감각을 지니고 있는 감독은, 어쩌면 지옥이란 전장이 아닌 일상 속에 있을 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미치게 사랑하거나 누군가를 가슴아플만큼 그리워할 때 그 행복한 순간에 지옥은 숨어 있다. 죽기 직전의 유작이 된 키에로프스키의 손길에는 삶의 영원한 아이러니에 대한 그만의 사유가 배어있다. 지옥같은 삶, 지옥같은 사랑, 로맨틱 코미디가 넘쳐나는 연말, '랑페르'는 삶의 비극을 관통하는 선택이 될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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