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서가에서-만인시인선을 위한 변명

나는 베스트셀러를 신봉하지 않는다. 황금만능 시대에 베스트셀러를 쫓아가는 것은 출판인으로서 어쩜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는 그것에 그리 관심이 없다.

예술성과 상업성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그래서 스테디셀러를 지향한다. 좋은 출판사란 단과대학, 아니 종합대학이나 다름없다. 출판사란 인문학의 보고로 시대의 담론(談論)을 생산해내는 곳이다. 오랜 세월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쌓아올린 텍스트를 보라.

나는 민음대학, 문지대학, 형설대학 출신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나는 문청 시절 '심상'·'현대시학'·시문학' 등 시전문지와 '세계의 문학'·'문학과 지성'·'창작과 비평' 등의 계간지를 읽으며 문학적 소양을 길렀다. 특히 민음시인총서와 문지시집·창비시집 등의 기획시집을 읽으며 문학 공부를 했고, 형설출판사에서 십수년 몸 담으며 편집과 영업으로 출판의 기본을 익혔다.

나는 첫시집은 반드시 민음사의 민음시선에서 내고 싶었다. 원고를 보내고 시집이 나오기까지 2년 남짓 걸렸다. 정말 자존심이 팍팍 구겨졌다. 그 기간동안 반정도의 시들이 바뀌었다. 진이 다 빠진 상태에서 첫시집 '몸나무의 추억'이 나왔다. 당시는 몰랐으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오히려 잘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만인시인선은 2001년 연말부터 출발했다. 일년에 다섯 권씩 십년정도 낼 계획이다. 기획시집 만인시인선을 만들면서 나는 나름대로 몇 가지 기준을 세웠다. 인세를 지불할 것, 영남 지역 사람일 것, 묵묵히 자신의 시세계를 열어가는 사람일 것 등이다. 첫번째 이하석의 '고령을 그리다'에서 김세진의 '점자블록'까지 어느새 23권을 내었으니 반환점이 가까워 온 셈이다.

전자출판이 범람하는 시대에 출판사를 경영한다는 일은 힘들다. 특히 지역에서 출판을 한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거기에다 인문학이나 문학 서적을 전문으로 출판하겠다고 마음 먹은 나를 보고 누군가는 간 큰 남자라고 놀린다.

그래도 나는 꿈쩍 않는다. 얄팍한 정신의 두께가 아니라 우직한 정신의 집적물인 책들을 만날 때 마냥 행복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혼신의 힘을 기울인 노작(勞作)의 원고를 만났을 때, 책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 어떤 기쁨과 바꿀 수 있겠는가.

박진형(시인·만인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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