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태흥의 어린왕자와 떠난 히말라야] ④인간의 땅 카투만두

북인도를 떠돌다 네팔의 수도 카투만두로 들어왔다. 카투만두의 거리는 외신에서 보도된 것보다는 훨씬 빨리 평온을 찾고 있었다. 외국인들을 위한 타멜(Thamel) 거리의 등산용품 가게 주인은 민주화 시위로 여행자들이 거의 끊겼다는 걱정을 하면서도 국민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정치인들이 분명히 알았으면 한다는 뜻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혁명은 배고픔보다는 배 아픔에 기인한다는 말은 가혹하다. 하지만 그 가혹함은 인간에게 먹는 것보다 인간답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는 명제가 담겨 있다. 절대적 빈곤보다 상대적 빈곤이 가져다주는 박탈감이 더 견디기 어려운 것임을 역사는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네팔은 현재 독재 왕정이 몰고 온 상대적 빈곤을 해결하기 위한 싸움이 진행 중이다. 부패한 왕정과 마오이즘(Maoism)으로 무장한 반군, 그리고 중국과 인도를 비롯한 외세까지 어느 것 하나 만만하지 않은 복잡한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그 속에 민주화를 갈망하는 국민들의 요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거세지만 외롭고 힘든 길인 것처럼 보인다.

이래저래 네팔의 국민들은 배고픔에 시달리면서도 배 아픔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중이다. 등산용품 가게에서 대여한 침낭의 찌든 냄새가 여행자를 씁쓸하게 한다.

안나푸르나를 함께 일주할 가이드와 포터를 오후에 만나기로 하고 첫 번째로 찾은 곳은 살아있는 여신을 모신 쿠마리 사원(Kumari Bahal) 이다. 쿠마리는 살아있는 신의 나라 네팔의 상징이다. 쿠마리는 옛날, 힌두교의 탈레주라는 여신이 카트만두 왕국에 나타난 전설에 기인한 신이다.

영특하고 아름다운 소녀로 현신한 여신은 왕이 욕정을 참지 못하고 범하려 들자 저주를 남기고 사라져 버린다. 왕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여신을 위한 사원을 짓고 간절히 기도하자 여신은 초경을 겪지 않은 순수한 어린소녀를 선택해 자신의 분신으로 섬기기를 명한다. 이 소녀가 바로 쿠마리가 된 것이다.

쿠마리가 되면 축제 기간인 1년 중 9월에 열리는 축제에 단 한번 3일을 제외하고는 밖을 나갈 수 없다. 또한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피가 몸에서 나와서는 안 된다. 뜻하지 않게 상처가 나서 단 한 방울의 피를 흘린다고 해도 이미 그녀는 부정을 타는 것이 되고, 쿠마리의 자격도 박탈당하게 된다. 그러기에 첫 생리가 시작되면 화려한 쿠마리로서의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년 전 쿠마리 사원을 찾지 않은 것은 야만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자유와 바꾼 다섯 살 소녀, 어린 쿠마리의 유배 공간을 부딪칠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용기를 내어 찾은 사원은 신이 거주하기에는 주변의 건물들에 비해 너무나 작았다. 엽서를 파는 이들이 앉아 있는 입구를 지나자 쿠마리를 친견하기 위해서는 돈을 내야 한다고 호객꾼이 따라 붙는다. 돈을 내면 이층 창문으로 쿠마리는 잠깐 얼굴을 내보이고 축복을 한다지만 돈과 축복의 의미를 받아들이기에는 여행자의 마음이 이미 편하지 않다. 쿠마리가 사는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 앞에 콜라와 과자 등을 파는 가게가 자리하고 있다. 어린 신의 집 앞에 놓인 콜라와 신의 축복을 파는 사람들, 여행자에게 쿠마리 사원은 여전히 어린 소녀의 유배공간에 불과하다.

사원을 나와 광장으로 나섰다가 깜짝 놀란다. 아이들이 비닐을 뒤집어쓰고 본드를 마시고 있다. 아이들은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 구걸을 하지만 남루한 옷차림을 주목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왕궁을 지키는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웬 상관이냐"는 표정이다. 결국 서툰 영어로 아이들을 붙잡고 본드가 얼마나 나쁜가를 설명했지만 아이들은 오히려 코끝에 본드를 잔뜩 묻히고 괴성을 지른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여행자의 절망은 아이들에게 점심대신으로 산 망고를 건네는 것뿐이다. 검은 신상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 신의 나라 네팔에 인간을 위한 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짐을 진 사람의 그림자가 힙겹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입맛을 잃고 말았다. 택시를 타고 세계 최대의 불탑으로 알려진 보드 나트 (Bodh Nath)로 향한다. 높이 40m의 세계최대의 스투파(stupa:불탑) 인 보드 나트는 이 곳 사람들에게 세상의 중심으로 믿겨지고 있는 곳이며 2006년 타임지가 세계에서 가장 신성한 곳으로 발표한 곳이다.

우기 탓일까? 보드 나트는 생각했던 것보다는 한적하다. 불교의 만다라(mandala)를 구성하고 그 우주적 상징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한 13단계를 묘사하고 있다는 가이드북의 어려운 설명보다는 언제나 동서남북으로 중생을 보살핀다는 부처의 눈이 먼저 와 닿는다.

"보드 나트의 탑에 왜 눈만 있고 귀가 없는지 아세요."사진을 찍다 만난 일본인 여행자가 묻는다.

"인간의 소원을 듣는 것보단 그냥 보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죠."그녀의 말처럼 소원을 들어주지 못하고 보기만 하기 때문일까? 이 년 전 오체투지로 스투파 주위를 끊임없이 돌던 티베트인들도, 구걸을 하던 걸인들도 보이지 않는다.

학교를 가지 못한 두 소녀가 내다 팔 치마를 만들고 있다. 큰 귀를 가진 티베트 동자승이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그의 생각은 막 얼음을 깨고 길어 올린 맑고 차가운 깨달음을 향한 것일까? 여행자의 생각 또한 넓고 깊어지고 싶다. 하지만 두고 온 것, 가진 것에 대한 애착에 마냥 외롭고 힘이 든다.

긴 우기의 시작을 알리려는 듯 한기가 느껴지는 약속 장소에 나타난 네팔인 가이드는 등산화와 등산복에 선글라스로 한껏 멋을 부렸지만 포터는 슬리퍼에 낡은 청바지 차림이다. 가이드 겸 포터를 구하고 싶다는 말에 신분의 차이가 있어 어려우니 따로 구해야 한다던 한국 여행사 직원의 말은 거짓이었다. 여행사가 두 사람에게서 수수료를 많이 떼기 위해 사촌지간인 그들을 따로 소개한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그들 노임의 절반 가까이를 수수료로 떼는 여행사에 화가 났지만 행여 그들이 받게 될 불이익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가이드인 유진은 한국말을 썩 잘하는 편이었고 포터인 쪼루도 성실해 보였다. 둘은 콜라를 잔에 가득 담고, 여행자는 밀크티를 가득 담은 잔으로 안나푸르나 무사 일주를 위한 건배를 한다.

세상에서 열 번째로 높다는 안나푸르나, 사람의 일상 속에서 오가는 길 중에 가장 높다는 고개, 토롱 라(Throung La, 5416m)를 향하는 저녁, 갑자기 굵은 빗줄기가 창을 때린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