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녘의 풍경은 어느 새 봄이다. 파릇하게 돋아난 냉이는 제법 살이 올라있다. 연일 봄비가 내린 탓인지 코끝에 스치는 젖은 흙냄새. 여름날 소나기 내린 뒤의 흙냄새와는 사뭇 다르다. 밭둑에 앉아 있으면 신선한 공기가 가슴속을 훑어 내린다. 햇살이 나뭇가지에 내려앉자 새들의 날갯짓에 숲의 아침은 분주하기만하다.
올해도 밭에다 씨를 뿌렸다. 봄볕에 얼굴이 탈까봐 모자를 꾹 눌러쓴 채 흙을 일구었다. 돌멩이를 골라내고 새 고랑을 만들었다. 손으로 흙을 만지고 있으면 시시로 찾아드는 울렁증에서 잠시 벗어날 수가 있었다. 시간을 잊고 그리움을 다스리는 나만의 방법이었다. 어린 시절 먹었던 음식이 잊을 수 없는 고향의 맛으로 기억되듯이 흙은 내게 그런 것이었다.
눈앞에 것만 급급해서 살다보니 건강이 나빠져 버렸다.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다 이 밭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작은 밭 한 귀퉁이를 빌려 어엿한 주말 농장 주인이 된 것이다.
평평하게 고른 흙에 상추, 열무, 아욱, 시금치씨앗을 정성껏 넣었다. 며칠 지난 후 열무 씨앗이 가장 먼저 올라왔다. 흡사 땅 위에 애벌레가 기어가고 있는 듯 고물고물 돋아났다. 같은 모양의 씨앗을 흙속에 넣었는데도 모습이 제 각각이다. 해마다 지켜보아도 그 일이 얼마나 신기한지 모른다. 푸성귀도 주인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던가. 들여다보고 만지작거리며 눈 맞춤을 하다 보면 내 마음을 알아차린 듯 흙을 밀고 얼굴을 쑥 내민다. 바라보는 내 마음에도 초록 풀물이 번져온다.
바쁜 나의 일상을 잠시 이곳에다 내려놓는다. 마음이 편안하다. 내가 밭을 자주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뿌린 것을 거두어 먹는 즐거움도 있지만 그보다 마음의 여백을 만들 수 있어 더욱 좋다. 매연 가득한 도심의 회색 공간을 보리밭으로 옮겨놓는 상상도 거침없이 하게 된다.
처음에는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것조차 서툴렀다. 생각해보면 지금보다 힘은 몇 곱절 더 들었으나 웬일인지 옮겨 심은 모종은 노랗게 죽어 가고 씨앗은 아예 올라오지도 않았다. 영문도 모른 채 마음만 동동거리다 제대로 수확을 하지 못했다.
이듬해 봄 다시 씨를 뿌리고 가꾸기를 반복하면서 도시생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기다림을 배웠다. 세상에 억지로 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오랫동안 바라보고 정성을 다해야만 얻어진다는 것을 흙을 통해 알게 되었다. 가을에 추수를 잘 하려면 때를 맞춰서 가꾸고 거름을 줘야 한다. 자식 키우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그게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풀을 뽑는 엄마를 도와주려고하다가 상추밭에 넘어지던 아이. 밭에 뛰어다니던 청개구리를 집에 데려오겠다고 울며 떼를 쓰던 녀석이 엄마 키를 훌쩍 넘은 걸 보면 밭과 친해진지도 오래 전이다. 그런 아이에게 청개구리를 왜 집에 데려올 수 없는지를 설명하느라 진땀이 났던 기억이 어제 일만 같다. 나중에 청개구리가 뛰어다니는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하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아직도 지키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웬만하면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아이들에게 밭을 찾게 한다. 올 봄에도 두 아이와 함께 고랑을 만들고 씨앗을 뿌렸다. 아이들이 커 가는 만큼 이제 밭일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간다.
그렇지만 그 일이 여간 잔손이 가는 게 아니다. 고추를 따서 일일이 닦고 정성들여 말리고 방앗간에 가져가 빻아보면 노력에 비해 양이 보잘 것 없다. 과정을 생각하면 부질없는 일로 보일지 모르나 누가 그 재미를 알까.
씨앗이 땅에 떨어져 싹을 틔우고 며칠 후 돌아보면 한 뼘쯤 자라있는 그 은밀한 즐거움을 말이다. 내 손끝에서 영글어 가는 열매를 바라보며 겸손해지고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은 세상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일이다.
손으로 심고 가꾸는 일을 하면서 내 안에 변화가 일었다. 작고 사소한 것들을 바라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마음의 움직임에 건강 또한 좋아졌다. 밭에 엎드려 몸을 낮추어보면 눈에 보이는 풀 한포기도 귀하게 여겨진다.
봄 들판에 짧은 바람 한 자락이 지나간다. 건너다보이는 능선에 산 벚꽃이 피었다. 뭉게구름이 무리지어 송두리째 산허리에 머물러있는 듯하다. 흰 모시옷 입은 여인을 닮은 산 벚꽃. 연두색 산 빛 사이에 소담스레 자리하고 있다. 은은한 파스텔 톤의 봄꽃들이 몸을 섞듯 온 산에 풀어져 내린다.
"그래, 오늘은 봄이야"
밭 한쪽에는 하얀 머리에 푸른 잎을 매단 쪽파가 채 줄지어 서 있다. 혹독한 겨울을 견뎌낸 새싹들이 제 몸보다 무거운 흙을 밀어 올려 봄 햇살을 쬐고 있다. 주위를 돌아보면 냉이와 별처럼 생긴 돌나물 꽃 그리고 이름도 예쁜 봄맞이꽃이 잔잔하게 무리지어 있다.
노란 볕이 쏟아지는 양지바른 밭둑에 온 식구가 앉았다.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꺼내 근사한 야외식탁을 차렸다.
"엄마 오늘 점심 메뉴는 뭐예요?"
한창 때라 아들 녀석은 먹고 싶은 게 많다. 넓은 그릇에 무생채와 봄나물 그리고 고추장을 넣어 쓱쓱 밥을 비볐다.
"엄마 콩나물은 왜 이렇게 조금 이에요. 고추장 더 줘요."
새순 같은 아이들의 입술에 밥알처럼 봄이 붙어있다. 바구니 끼고 캐온 나물은 아니지만 흙냄새 맡으며 먹는 점심 한 끼가 더없이 좋다.
소박한 밭뙈기 한 쪽에서 그리움 같은 울렁증을 다스리는 나처럼, 봄날의 정지된 풍경 한 장이 아이들 가슴에도 오랫동안 간직 되었으면 좋겠다.
슬그머니 일어난 큰 아이가 개울가로 가서 물수제비를 뜨고 있다.
◇ 필자소개
김혜주= 수필가. 매일신문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2007년). 경상북도 경산 출생. 서울에서 아파트 생활을 하지만 잃어버린 건강을 찾기 위해 오래 전부터 근교에 텃밭을 가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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