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강유정의 영화세상] 클래식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나에겐 지금 이 시절은 부러움과 결핍의 계절이다. 서로 낯선 얼굴들을 한 수강생들이 따뜻해지는 날씨와 더불어 조금씩 술렁인다. 누군가 발표를 하면 웃음이 터져나오기도 하고 장난기 어린 야유나 환성도 간혹 빚어진다. 그러다 보면 어떤 남학생 곁에는 항상 그 여학생이 앉게 되고 우리가 캠퍼스 커플이라고 말하는 연인들이 된다. 스무 살, 초란처럼 순결하고 연약한 나이에 그들은 이제 사랑을 시작한다. 그것은 아마 고등학교 시절 영어책 사이에 쪽지를 끼워 일상의 고단함을 나누던 동료애와는 다를 것이다. 고등학교 때, 재수할 때 사랑이라고 느꼈던 것들이 이상하게 새로 시작된 캠퍼스의 사랑 앞에서는 유치해진다. 무릇, 스무살의 사랑이란 이런 거만에서 시작된다.

곽재용 감독의 2003년작 '클래식'은 이처럼 새로 시작하는 사랑의 감정을 잘 다스려 놓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속에는 두 가지의 사랑이 중첩된다. 하나는 어머니가 고등학교 시절 고향에서 경험했던 첫 사랑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딸이 현재 겪게 되는 대학시절의 첫사랑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시간 여행 속에서 증폭되는 것은 봄 날의 벚꽃처럼 환하게 흐드러진 첫사랑의 열망이다. 순결하고 풋풋한 미소 속에 첫사랑은 익어가고 당신은 의미있는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손예진은 이 영화에서 1인 2역을 맡아 연기하는 데, 어떤 점에서 이 작품은 손예진이라는 십대 소녀를 배우로 각인하게끔 만든 최초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반디불이가 날아다니는 시골의 고즈넉한 개울가에서 상대역 조승우와 나누는 은밀한 눈빛은 보는 이마저 설레게 한다. 그렇다. 아마도 첫사랑의 감정은 '설렌다'는 동사에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일테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정체모를 감정의 습격 속에 나날은 행복하고 또 초조하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딸에게도 이 초조와 행복은 여전하다.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이라는 음악과 함께 빗속을 뛰어가는 두 남녀는 이 촉촉한 첫사랑의 질감을 전달하기에 충분하다. 통기타의 선율 속에서 마치 빗방울이 튀듯 하얀 운동화를 신은 여대생이 뛰어간다. 비는 그들의 설레는 감정에 깃든 윤기처럼 그렇게 스크린을 윤택하게 한다. 비둘기, 비, 한얀 양말이 돋보이는 발목, 편지. 영화 '클래식'은 우리가 마음 한 구석 '첫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저장해둔 오브제들을 하나씩 꺼내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언제든 '클래식'을 보게 되면 그 첫사랑의 감수성으로 들뜨게 된다. 춘곤증에 스르르 잠이 들 것 같은 오후, 창 너머 비치는 햇살 가운데 이 영화는 찰나의 무지개처럼 찬란하다. 조금은 유치해 보이고 조금은 순정만화처럼 비현실적이지만 그것이야 말로 첫사랑의 특권 아닌가? '과연 당신이 나를 사랑할까'라는 조바심 나는 질문 앞에 엄마의 일기장을 뒤지는 딸의 심정, 그것은 무릇 처음 느낀 감정으로 혼란스러워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일테다. 가냘프지만 강인한 추억의 힘, 첫사랑은 그렇게 지나간다. 발효되기도 전에 변질돼 버리는 감정, 그것이 바로 첫사랑이니 말이다.

강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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