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시절 '대한매일신보' 발행인이자 언론인 배설이 1909년 5월 1일 종로구 홍파동 2의 38번지 대한매일신보사 사옥이었던 자신의 집에서 병사했다.
1872년 영국 잉글랜드 남부의 브리스톨에서 출생했으며, 본래 이름은 Bethell, Ernest T.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런던 데일리 뉴스' 특파원으로 내한한다. 1905년 양기탁 등과 함께 국한문으로 된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창간, 일본의 침략행위를 과감하게 비판하고,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했다. 또한 고종의 친서를 게재하여 국내·외에 일본의 강압적 침략행위를 폭로하였다.
그 무렵 일본 측이 언론에 대해 검열을 실시하고 직접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때였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주한 일본 헌병사령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민족의 대변자 역할을 다할 수 있었다. 사세가 확장되고 독자수도 늘어나 발행부수 1만 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이 됐다.
배설이 신문을 통해 일본의 한국침략을 폭로하자 일본은 탄압을 가해온다. 일본 측은 배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 1907년과 1908년 2차례에 걸쳐 재판에 회부했으나 무죄 석방됐다. 배설은 이러한 탄압과 싸우는 가운데 1908년 5월 27일부터 발행인 명의를 영국인 만함(Alfred Marnham)에게 물려준다.
▶1992년 LA 흑인 폭동 ▶1851년 최초의 만국박람회
정보관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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