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학이 있는 길)모항②-정양의 '모항에서'

소멸될 수 없는 그리움 숨쉰다

죽음이 숨을 쉬고 있는 바다, 죽음을 생각해도 전혀 죄스럽지 않은 바다, 난 이 모항을 만나기 위해 40년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아마 이젠 겨울이 되기만 하면 이 모항이 그리울 게다. 모항 둥근 백사장을 뚫고 쏟아지던 달빛만큼이나 모항에 대한 내 그리움도 키가 자랄 거다. 모항 언덕 솔가지와 동백꽃잎 사이로 소복하니 쌓였던 눈송이만큼이나 내 그리움도 자랄 거다. 그렇다. 난 이제 말할 수 있다. 삶에 지칠 때, 타인에 의해 상처받았을 때, 타인과의 말 걸기가 힘겨울 때, 결국은 내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낄 때 이젠 모항으로 가자. 그리고 거기에서 성숙한 내 죽음과 만나자. 터럭도 남기지 못하고 단지 한 줌 재로 사라지는 우리네 삶의 허무를 만나자. 모항은 그런 곳이다. 모항은 소리 지르지 않는다. 내가 여기에 있다고 자랑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모항을 진실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아는 사람이 드물기에 모항은 아직도 아름답다. 모항은 아직도 변산의 이방(異邦)이다.

술 취하여 눈 내리는 민박의 한밤중에 / 나는 누구를 말 못하게 보고 싶었나 / 나는 어디로 무작정 가고 싶었나 / 누구에게 그 눈보라 보이고 싶었나 // 그 밤중에 눈보라에 파도소리에 / 한사코 그 바다를 떠나고만 싶던 까닭을 / 비틀거리며 나는 모른다 / 한사코 나를 말리던 이들도 모른다 (정양, '모항에서' 부분)

그리고 8개월이 지났다. 지금 모항에는 비가 내린다. 지난 겨울, 삶에 찌들고 너무나 지쳤을 때 눈 내리는 모항을 만났었다. 다시 만나는 모항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때보다는 많이 편안해진 것일까. 눈이 아니라 비가 내리고 있는데도 마음이 편안하다. 이제는 내가 우는 것이 아니라 모항이 운다. 그래. 울고 싶으면 모항으로 오라. 무너지는 슬픔을 만나려면 모항으로 오라. 그리하여 끝내 죽음을 만나려면 모항으로 오라. 만조였기에 바다는 해변 끄트머리까지 나와 있었다. 겨울에는 볼 수 없었던 수많은 부유물들, 비가 내려서 떠내려온 것, 혹은 관광객들의 쓰레기, 혹은 내 마음 속의 쓰레기. 거기에도 슬픔이 있었다. 그렇구나. 이 세상 살아가는 모든 게 슬픔이로구나. 모항은 그런 슬픔을 퍼내는 곳이로구나. 과연 모항이 그런 곳인가 하는 의심은 하지 말기를. 삶은 그런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으로 채워져 있으니까.

모항에 어둠이 내렸다. 이제 모항은 보이지 않는다.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모항레저타운. 영혼의 크기만큼 보고 느낄 수 있다면 모항에는 무한한 크기의 아름다움과 그리움이 있다.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터졌다. 살짝 얼굴을 보였다가 사라지는 모항.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숙소 베란다 곳곳에서 탄성과 함께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다는 다시 해변으로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빗줄기가 강해지면서 바다 소리와 겹쳐졌다. 바다는 무거운 소리로 밀려들고 있었다. 귀를 어지럽히는 빗소리, 바다 소리. 바다를 껴안고 잠깐 잠이 들었다. 모항은 이미 내 몸 속에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바다는 날 오랫동안 재우지는 않았다. 베란다에 나가 바다를 바라보았다.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해변은 이미 바다로 가득 차 있었다. 새벽 3시, 사위는 침묵으로 가득했지만 여전히 바다는 밀려오고 있었다. 모두가 잠든 시간, 바다만이 살아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 바다가 무엇보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건 거기에 소멸될 수 없는 그리움이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바다 냄새, 싸리꽃 냄새, 비 냄새, 그리고 그리움 냄새. 여름 모항에는 싸리꽃이 많았다. 아주 작은 꽃잎들이 바르르 빗속에서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움의 진정한 실체는 여전히 아무도 모른다.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 정양의 '살아있는 것들의 무게'

"실제로 나는 시인으로서 다른 사람들한테 부끄러운 게 그런 거예요. 말하자면 시를 안 쓰고 살던 그 시절, 그 중요한 시기에 한 번도 봉급을 안 받아본 달이 없었어요. 언제나 교편을 잡고 있었지. 그때 그 친구들은 학교도 그만두고 감옥에도 가고 그랬는데, 난 한 번도 봉급을 안 받아본 달이 없이 살았어요. 그 점은 참 부끄러워요. 언젠가 '한 번도 월급을 안 받아본 일이 없이 살았다는 게 시인으로서 참 부끄럽다.'고 쓴 적이 있어요. 그게 미안하죠."

어느 인터뷰에서 시인이 이 시집에 대해서 말한 내용이다. 이 시집에는 인간답게 살고 싶었던 마을공동체의 오랜 그리움이 담겨 있다. 남도의 황톳빛 슬픔을 농익은 가락과 깊고 넓은 추임새로 품어 안는 따뜻하면서도 슬프고 넉넉하면서도 견고한 세계가 낯익은 시골의 고샅처럼 펼쳐진다. 그러면서도 70, 80년대를 아무 일 없이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이랄까. 하지만 이미 잔치가 끝난 시대에 최소한 그런 사고를 지니고 사는 것조차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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