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과 달리 인간의 엄지는 나머지 네 손가락과 마주 보고 있다. 이 작은 차이가 인류 문명을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나머지 네 손가락과 맞닿을 수 있는 엄지가 있음으로 인해 정교하게 물건을 쥐는 동작이 가능했고 인류는 도구도 만들어냈다. 손가락의 정교한 움직임과 더불어 뇌의 용량도 커졌다. 자고로 엄지는 최고의 상징이었다. 최고를 가리킬 때 사람들은 엄지를 치켜세운다.
그러나 엄지의 영광은 컴퓨터로 대표되는 정보화가 진행되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키보드 입력에서 엄지가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스페이스' 키를 누르는 것이 전부다. 검지가 마우스의 클릭 버튼과 스크롤 버튼을 종횡무진할 때 엄지는 옆에서 보조만 하는 설움을 당했다. 와신상담, 절치부심하던 엄지의 영광을 부활시킨 것은 휴대전화였다. 엄지는 휴대전화를 열고 닫는 것은 물론이고 모든 문자판을 도맡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하루에 유통되는 2억 7천만 건의 문자메시지는 대부분 엄지로 처리된다. 엄지가 문자판을 꼭꼭 눌러 작성한 문자메시지는 초당 3천 건 꼴로 허공에 날아다닌다. 음성보다는 문자 소통에 익숙해진 '엄지족'들이 양산됐으며 엄지는 모바일 시대 소통의 중심 도구로 화려하게 섰다.
인체 구조상 엄지는 문자판을 입력하기에 효율적이지 않지만 엄지족들의 타이핑 속도는 그 한계를 넘어 놀랍게 진화했다. 지난해 11월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휴대전화 문자 빨리 보내기 대회에서 16세 여학생은 160자의 알파벳을 42초 만에 전송해 세계 기록을 세웠다. 지난 4월 미국에서 열린 대회에서는 13세 여학생이 34자의 영문자를 15초 만에 전송, 우승을 차지하면서 2천300만 원의 상금을 건졌다. 국내에서도 엄지로 분당 수백 타를 구사하는 고수가 적지 않다.
# 검지의 반격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에 그려놓은 불후의 명화 '천지창조' 가운데 '아담의 창조'에서 아담은 집게손가락을 내밀어 신과 소통한다. 주인공 소년과 E.T의 검지 끝이 맞닿은 장면은 영화 'E.T'의 가장 상징적인 신이다.
이렇듯 감성과 촉각을 대표하는 인체 부위지만 검지는 적어도 휴대전화 세계에서 엄지에게 밀려 자존심이 상하던 차였다. 그러던 검지가 휴대전화 세계에서 반격을 꾀하고 있다. 검지가 믿는 원군은 '터치 스크린'(Touch Screen)이다. 엄지로 버튼을 꾹꾹 누르는 대신, 검지로 터치 스크린을 가볍게 눌러 모든 작업을 할 수 있는 신개념 휴대전화가 속속 출시되고 있는 것이다.
검지는 태생적으로 엄지보다 기동력이 뛰어나 입력 수단으로 유리하다. 터치 스크린 방식은 키패드보다 입력키를 다양하게 구사할 수 있는 것 외에도, 필기체 글씨를 인식해 멀티미디어 문자메시지로 보낼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지난 5월 LG전자가 국내에 출시한 휴대전화 '프라다'와 6월 29일 애플이 미국에서 선보인 '아이폰'이 터치 스크린 방식의 대표적인 제품이다. 삼성전자가 내놓은 '울트라뮤직폰'과 모토롤라가 출시한 '스퀘어드'는 문자판과 터치 스크린을 겸용하고 있다.
지난달 국내에 출시된 HP의 '터치 스마트' PC는 터치 스크린을 씌운 모니터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누르는 동작으로 거의 모든 기능을 작동시킬 수 있는 제품이어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생활 가전에서도 터치 스크린을 채택한 제품들이 쏟아지고 있으며, TV화면을 손으로 누르면 지면 형태의 신문을 볼 수 있는 'TV신문'도 등장했다.
# 엄지 vs 검지
시장조사기관인 아이스플라이는 터치 스크린의 전세계 시장 규모가 올해 24억 달러에서 2012년 44억 달러로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마이크로소프트 빌 게이츠 회장은 "앞으로 집안 곳곳은 여러개의 고화질 스크린과 터치 스크린으로 꾸며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시장 전망은 장밋빛이지만 검지의 반격에 엄지가 밀려날지는 미지수다. 버튼을 꾹꾹 눌러 문자를 입력하는 사용자들의 습관이 쉽게 바꿔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 터치 스크린 방식의 휴대전화는 키버튼을 누를 때 느끼는 '손맛'(피드백)이 없다. 아직까지 입력 속도에서 터치 스크린은 키패드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으며 내구성이 떨어지고 가격도 상대적으로 비싸다.
이러한 단점들을 해결하려는 시도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어 터치 스크린 측은 장래를 낙관하고 있다. 터치 스크린 입력시 딸깍거리는 느낌을 진동으로 제공하는 피드백 기술이 개발됐으며, 특정 지점의 100만 회 반복 입력을 견딜 수 있는 내구성 높은 제품도 나왔다. 시장조사기관인 스트래터지 애널리스틱스는 "터치 스크린의 비용절감과 유저 인터페이스 향상에 따라 오는 2012년에는 세계 휴대전화의 40%가 터치 스크린을 채택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 터치스크린의 원리
터치스크린은 어떤 원리로 손끝이나 전자펜의 접촉을 입력 신호로 변환할까.
터치스크린은 일반 모니터 화면에 덧붙여져 있는 터치 패널(touch pannel)을 일컫는다. 정전 용량 터치 패널을 기준으로 설명하자면, 터치 패널은 유리판과 필름막이 겹쳐진 모양새를 하고 있고 여기에는 미약한 전압이 걸린다. 스크린 표면에 접촉 등 힘이 가해지면 전극막이 눌리면서 전위차(전기신호)가 발생하며, 전위차가 발생한 지점의 좌표가 컴퓨터로 입력된다. 적외선 방식의 터치스크린도 있다. 터치 패널 안에 적외선을 흐르게 해 화면에 수많은 사각형 격자가 생기도록 함으로써, 물체가 격자에 닿으면 위치를 파악하는 방식이다.
◇ 터치 스크린 진화 어디까지
터치 스크린은 촉각을 이용하는 감성적 입력장치다. 은행 자동화기기 등이 보여준 단순하고도 반응 느린 터치 스크린에 실망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기존의 한계를 뛰어넘거나 새로운 개념의 터치스크린이 개발돼 상용화를 기다리고 있다.
PC 키보드를 사용할 경우 쉬프트(Shift)와 문자키를 동시에 눌러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기존의 터치 스크린은 한 순간에 오로지 하나의 접촉만을 인지하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멀티 터치'라는 신기술이 나왔다. 여러 손가락을 동시에 눌러도 두 군데의 신호를 터치 스크린이 인지하는 기술이다.
멀티 터치 기능은 애플사가 출시한 신개념의 휴대전화 '아이폰'에 탑재돼 화제를 모았다. 아이폰은 내장된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은 뒤 손가락 두 개를 터치 스크린 상의 이미지에 갖다 대고 당기는 방법으로 사진의 크기를 조절할 수 있다.
터치 스크린을 씌우지 않고도 터치 스크린 기능을 구현하는 제품이 나왔다. LCD모니터의 패널을 손가락으로 접촉하면 거기에 비친 그림자 위치를 좌표로 읽어내는 기술이 그것이다. 이 제품의 경우 LCD모니터에 터치 스크린을 덧씌울 필요가 없어 원가 절감은 물론이고 두께도 25% 정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MS사가 최근 발표한 '서피스'(Surface)라는 제품도 독특한 터치 스크린 기능으로 주목받고 있다. 서피스는 넓은 터치 스크린을 얹은 테이블 모양의 제품. 엄밀히 말하자면 서피스에는 터치 스크린이 없다. 화면 밑에 내장된 5개의 적외선 카메라가 찍은 영상으로 손가락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분석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블루투스(무선통신 기술의 하나) 기능이 지원되는 디지털카메라를 서피스 테이블 위에 얹어놓으면 서피스는 카메라를 인식하고 카메라에 저장된 사진을 내려받아 보여준다. 사용자는 손가락을 이용해 사진을 이동 또는 축소·확대할 수 있다. MP3플레이어나 휴대전화도 이런 방식으로 서피스와 연동해 사용할 수 있다.
터치 스크린과 화이트보드가 결합된 제품도 개발됐다. 미국 캘리포니아 애너하임에서 지난달 19일 선보인 '액티브 보드'가 그것이다. 액티브 보드는 대형 모니터로 활용되는 스크린 위에 글씨를 마음대로 썼다가 지웠다가 할 수 있는 신개념의 칠판이다. 강의 내용을 파워포인트로 만들어 액티브보드에 띄워놓고 칠판에 글씨를 쓰듯 내용을 변경하거나 수정하면서 강의를 진행할 수 있다.
김해용기자 kimh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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