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보자. 여름밤을 서늘하게 식혀줬던 '전설의 고향'. 머리 풀어헤친 하얀 소복의 귀신이 쓰윽~ 나타나고, 꼬리 아홉개 구미호가 재주를 넘는 그 모습을 보며 엄마 치맛자락 뒤로 숨어들었던 기억 하나 쯤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예전엔 귀신이야기들도 많았다. 홍콩할매귀신, 콩콩귀신, 빨간마스크의 전설…. 귀신이야기를 듣고 나면 화장실 가는 것도 겁나 친구 서너명이 손 꼭 붙잡고 다녔던 기억이 선 하지만, 잊어버릴만 하면 또 다시 새로운 버전의 귀신이야기를 만들어냈던 것이 이 당시 또래들의 '문화'였다.
지금 들어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들. 성인의 눈으로 바라보면 군데군데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논리상의 허점 때문에 실소가 뿜어져 나오고, "에이, 다 지어낸 이야기야."라며 콧방귀를 낄 일이지만 그땐 정말 등꼴이 오싹하게 했던 '괴담'들이다. 그 옛날 '귀신이야기'의 추억을 더듬어보자.
◇귀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정신의학에서는 귀신을 봤다는 것을 일종의 '해리(解離)'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술 먹고 필름이 끊기는 것이나 마약 복용 상태처럼 자기 의식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동산의료원 정신과 김희철 교수는 "간혹 환자들 중에 지속적으로 눈에 귀신이 보인다며 찾아오지만 대부분은 정신병적인 증상들로 약물치료와 상담을 통해 증상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는 해리 경향이 높은 환자들에게 주로 발생하는 경향이다. 최면학에서 암시에 잘 걸리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무서운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이미지를 떠올리다보면 마치 이것이 실제 현상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는 것.
자기장의 영향으로 뇌에 이상이 발생한다는 설명도 있다. 사람들이 귀신을 봤다고 했을 때는 뇌의 측두엽 부분의 뇌파에 변화가 생긴다는 연구 보고가 많은 것. 귀신이 나온다는 곳을 조사하면 자기장이 센 곳이 많은데 이런 자기장의 변화가 뇌에 전기적 자극을 줘 일종의 환시(幻視)가 생길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김 교수는 "실제로 귀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아무도 꼭 집어 말할 수 없다."며 "환자들 중 치료를 통해서도 전혀 증상이 개선되지 않는 사례가 종종 발생하는데 이는 현대의학으로는 풀 수 없는 비밀"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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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 지루한 일상에 한 줄기 시원한 청량음료의 역할을 해 주는 것 하나가 바로 '괴담'이다. 듣기만 해도 몸이 으슬으슬, 짜릿한 두려움을 선사하는 귀신이야기들. 이들만큼 오랫동안 그 명맥을 유지하는 이야기도 찾아보기 힘들것이다. 1980, 90년대 유행했던 철 지난 귀신이야기들은 아직까지 아이들 사이에서 그 마력을 이어가고 있다.
나이 든 어른들은 무릎을 치며 "아, 그때 그 이야기?"라고 새삼 기억을 떠올리거나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라며 웃어버릴테지만 지금도 학교 앞 문방구에서는 500원 짜리 소책자로 만들어진 각종 괴담책들이 여전히 아이들의 손때묻은 돈을 거둬들이고 있을 정도다. 괴담의 인기는 왜 식을 줄 모르는 걸까?
◇괴담은 사회상을 반영한다?
빨간마스크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1980년대 '빨간마스크'는 부부싸움을 하다가 남편에게 입이 찢겼다거나, 교통사고를 당해 입이 찢어졌다는 설명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이야기는 전혀 새로운 '근거'가 업데이트 됐다. 외모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급증하면서 동생의 미모를 질투한 언니들의 분노라든가, 성형수술에 실패한 결과라는 버전으로 교체된 것.
사실 이 '빨간마스크' 이야기는 1978년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 아이를 학원에 보낼 수 없었던 부모가 학원가고 싶다고 떼를 쓰는 아이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라고. 그리고 1980년대 일본에서는 이 괴담 때문에 실제 경찰차가 출동하는 소동이 벌어지고, 전국적으로 입 찢어진 여인에 대한 주의사항이 가정통신문에 특이사항으로 기재되기도 했으며, 한 초등학교에서는 집단하교를 실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민지' 괴담 역시 당시의 흉흉했던 사회 분위기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1980년대는 정부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할 정도로 유괴사건과 토막살인, 인신매매 등 강력범죄가 잇따랐던 시기. 나도 언제 범죄의 피해자가 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괴담의 '공포'를 극대화 했던 것이다. 만연 2등이 죽인 1등이 귀신이 되어 나타나는 성적괴담이나 선생님의 매질로 죽은 학생 이야기 등 학교괴담에도 집단의 공포가 잘 드러난다. 한국의 대표적 요괴가 처녀귀신인 것도 남녀차별이 심한 사회적 현실을 대변한다.
◇일제시대의 잔재가 아직까지
"빨간 종이 줄까, 파란 종이 줄까?" 기성세대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 화장실 괴담. 여기서 빨강은 피를 흘리는 것을, 파랑은 피가 몸에서 완전히 빠져나가 얼굴색이 파랗게 변하는 것을 나타내는데 모두 죽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 괴담이 일본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얼마되지 않는다.
'한국의 학교괴담'이라는 책을 쓴 중앙대 민속학과 김종대 교수는 "우리나라에 전래되는 괴담의 상당수는 일본의 요괴이야기, 민담에서 영향을 받은 것들"이라며 "특히 학교 괴담의 경우에는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 많은데 이는 일제 강점시에 우리나라에 일본이 근대적인 학교 시스템을 확립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밝혔다.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려보자. 전국의 학교마다 빠지지 않고 전해졌던 전설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학교 부지가 공동묘지를 갈아엎고 만들어졌다는 것. 이 때문에 소풍이나 운동회 등 학교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때마다 비가 온다는 이야기가 아이들 사이에서는 꽤나 신빙성 있게 떠돌았다.
김 교수는 "한국적 정서에서는 공동묘지를 허물고 학교를 세우는 발상이 가당치 않을 뿐 아니라, 예로부터 공동묘지는 마을과 상당히 떨어진 곳에 만들었다는 점에서 우리 현실과 다르다."고 해석했다. 마을 한 가운데 묘지를 두기도 하는 일본의 경우가 우리의 학교 전설에 베어 든 것이라는 설명이다.
'분신사바' 역시 일본에서 유래됐다. 분신사바란 19세기 이전 일본의 수 많은 밀교 단체 중 한 곳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실제로 영혼을 부르는 하급 주문이었다고 한다. 1980년 말 대구를 통해서 상륙된 이 주문의 원 주문은 '분신사바 사파이 오이테 쿠다사이'. 김 교수는 "해석을 하면 그저 '귀신이여 나에게 오라' 정도이지만 그 속에 숨은 뜻은 '나의 영혼을 살라 지금 궁금증을 푼다'는 뜻으로 귀신에게 나의 영혼을 팔아넘기는 의식"이라고 밝혔다.
◇괴담의 주 소비층은 10대 학생들
여름철만 되면 영화관에는 보기만 해도 섬찟한 포스터들이 하나 둘 내걸리고, 영화관은 10대 소녀들에 의해 점령된다. "꺄악~"하고 소리를 내지르며 한층 더 섬뜩한 분위기를 연출해 내는 것도 바로 이들이다. 공포영화의 주 소비층이 10대라는 분석이 이어지면서 아예 우리 영화판에서는 이들을 타겟으로 한 공포영화들이 매년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다.
이에 대해 영화평론가 강유정 씨는 "공포영화는 그 시대에서 가장 억압된 장소를 배경으로 한다."고 설명했다. 학교라는 억눌린 공간에서 마음대로 웃고 떠들지 못하는 우리 10대들의 모습을 배경으로 성적과 자살 등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교육 현실을 빗대 그려놓다보니 '공감'과 '카타르시스'를 동시에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공포영화와 마찬가지로 괴담의 주 소비층 역시 학생들이다.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가릴 것 없이 '괴담'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고, 입에서 입으로 전파시킨다. 김종대교수는 "그 중에서도 고등학생들의 괴담이 가장 괴기스러우면서도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풀이했다. 초등학생의 괴담은 만화처럼 우스꽝스럽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들이 많고, 중학생 시기에는 연예인에 빠져들면서 '괴담'이 인기를 얻지 못한다. 하지만 고등학생들은 밤 늦은 시간까지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공부에 대한 중압감이 늘어나면서 억눌린 이들의 심리를 '괴담'을 통해 표출해 내고 있다는 것이 김 교수의 분석이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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