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차 한잔의 단상]자랑스러운 근영이

손님이 왔습니다. 터벅머리에 까칠한 수염, 방황의 흔적이 역력합니다.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왔다가 잠시 시간이 나서 연락했다" 고향친구가 보고 싶어서 왔다는 그의 손을 잡고 복현 오거리 막창골목에 앉았습니다.

"날 받았다" 편하게 뱉어내는 한마디에 가슴이 철렁합니다. "왜, 많이 편찮으시냐?" 온몸에 종양이 퍼져서 손 쓸 수없는 지경이라고 합니다. 포항에서 대구로 이리저리 병원을 떠돌다 마지막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위로의 말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막창 몇 토막을 숯불 위에 올려놓고는 집게로 맴을 돌립니다. "이 녀석들 반항하네, 납작하게 누워있지 않고!"

술의 마법이 효력을 발휘합니다. 묵은 이야기를 소설처럼 풀어냅니다. 녀석은 중학교시절 화려한 전과가 있습니다. 형보다 용돈이 적다고 농약을 마신 사건입니다. 맏아들 형과 막내인 동생의 중간에서 늘 소외된다는 불만이 폭발했던 것입니다. 음독의 후유증은 참담했습니다. 몇 주 동안의 병원신세를 지고 겨우 깨어난 녀석은 입이 삐뚤어졌고 말조차 어눌해졌습니다.

"뭐하노~ 한잔하자" 맥주잔을 강하게 부딪치고는 시원하게 들이킵니다. "군대 제대하고 세상 정리하려고 했다" 군3년 동안의 고문관노릇, 자포자기상태에 빠진 녀석은 스스로 아무쓸모도 없는 존재라고 결론 내린 것입니다.

일순간,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억지 말을 붙이는 녀석의 얼굴에 미소가 번집니다. 며칠 전 녀석은 직장에서 주는 봉사활동대상을 수상했습니다. 3만 명이 넘는 사원들 중에서 뽑혔으니 그 이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헌혈증서가 100장이 넘습니다. 매주 무의탁 노인과 신체 불편한 이들을 찾아 보살핍니다. 최근에는 방범활동까지 추가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렇게 많은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고 새로운 자신을 찾았다는 녀석, 아이들에게 어떤 아버지가 될까를 고민하다가 봉사활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욕심이 목젖까지 차 있을 때는 늘 부족하고 모든 게 불만이었는데 이제는 무엇이던 차고 넘친다고 여유를 부립니다. "할 수 있는 일만 찾아 해도 평생 바쁘게 살 텐데 굳이 어려운 일을 쫒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아버지의 일은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녀석의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한잔하자!" 치~ 치~ 불판에 떨어진 빗물 몇 방울이 통통 춤을 춥니다.

이정태(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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