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국 시집살이 할만하네요"…외국인 며느리 백일장

▲ 외국인 며느리들이 한글날을 기념한 한글백일장에서 그동안 갈고 닦은 솜씨를 발휘하고 있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 외국인 며느리들이 한글날을 기념한 한글백일장에서 그동안 갈고 닦은 솜씨를 발휘하고 있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일찍'이 맞아? '일직'이 맞아?" "'일찍'이지 싶은데··· 뭐, 틀려도 괜찮아."

9일 한글날 오전 대구 중구 달성동 달성공원 안 관풍루 아래 벤치. 외국인 며느리들이 소복이 모여 앉아 '한글 글짓기'에 나섰다. 대구YWCA가 한글날을 맞아 대구에 사는 결혼이민여성을 대상으로 연 백일장에 외국인 며느리 67명이 참가한 것.

글을 쓰는 데 주어진 시간은 2시간 남짓. 여유를 부리기엔 턱없이 모자라는 시간이다. 그러나 200자 원고지 10장 묶음을 받아들고 이내 써내려가는 이들. '나의 한국살이', '고향이야기' 등을 주제로 또박또박 써내려갔다.

채 몇 분 지나지 않아 한국말은 어렵다는 말이 나온다. 생각은 화산 분화구에서 용암이 흐르듯 쏟아지는데 막상 글로 쓰려니 적당한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 탓이다.

원고지 작성법을 몰라 1cm x 1cm 크기의 칸에 두세 글자씩 넣는 건 예사. '조카'를 '족하'로 쓰는 것도 애교였다. 심지어 '한국살이'를 '한국살인'이라고 적기도 하는 등 무시무시한 오·탈자도 심심찮게 나왔다. 소수였지만 일부에선 '^^' 나 'ㅠㅠ' 같은 이모티콘도 글자로 등장했다. 전자사전을 준비해오거나 미리 글을 써온 사람도 눈에 띄고, 외워서 온 듯 결혼연차에 맞지 않게 일필휘지로 원고지를 채우는 이도 더러 보였다.

반면 아기를 키워본 고연차 주부들은 확실히 달랐다. 베트남 출신 트린티딘(24·달서구 진천동) 씨는 "올 여름 아기에게 땀띠가 났어요. 몸에 조그맣고 빨간 게 나는데 '땀띠'라는 단어를 모르면 안 되잖아요." 한글날이 어떤 날인지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는 트린티딘 씨. "음...왕인데, 대왕인데... 돈에 있잖아요. 그 사람 기념하는 날이잖아요."

200자 원고지 3~5장 분량을 채우면 된다했지만 '실력파' 며느리들은 그들의 삶을 글에 담아내느라 10장도 모자라 보였다. 원고지를 가득 채워 뒷면 백지에까지 글을 써넣던 소우건(32·동구 신암동) 씨에게 이번 백일장은 그간의 삶과 생각의 표출구처럼 보였다. 중국 심양 출신으로 한국에 온 지 8년이 넘었다는 소 씨는 '한국에서 며느리로 산다는 것'이라는 큰 제목 밑에 '시간, 용기, 노력'이라는 소제목을 달아가며 웬만한 대학생 못지 않은 솜씨로 글을 써내려갔다. 소 씨는 글에서 '결혼은 궁궐에서 생활하는 거랑 같다. 궁궐 안에 사는 사람은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하지만, 궁궐 밖에 있는 사람은 안을 궁금해 한다. 궁궐 안 생활을 잘 하려면 시간, 용기,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썼다.

한국에 시집온 지 10년 정도 됐다는 중국 출신 류쩐(36·달서구 이곡동) 씨는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그리는 사모곡을 구구절절 풀어냈다. 류 씨는 반듯한 글씨체로, 실제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처럼 글을 써 읽는 이의 가슴을 짠하게 만들었다.

심사를 맡은 유영식 경일대 한국어교육과정 강사는 "의외로 글 수준이 높다."며 "특히 생활에서 나온 소재와 경험들이 내용의 주를 이루다보니 가슴에 많이 와닿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백일장은 서울과 대전에서도 동시에 진행됐으며 이들의 글은 비매품으로 출판될 예정이다.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