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회를 꿈꾸며
권갑하
군자교 지나 길은 인질로 잡혔다
끝은 보이지 않고 되돌아갈 수도 없는
문명에 지친 하루가 백미러 속에 갇혀 있다.
지급기한 다 넘긴 주머니 속 어음장처럼
자꾸 눈에 밟히는 새우잠 자는 들꽃들
미풍이 지날 때마다 강도 비늘 벗는다.
벌써 몇 시간째 차선을 앞다투지만
가 닿을 꿈의 자리는 가드레일처럼 구겨져
중랑천 검은 가슴 위로 맥없이 떠내려간다.
가장 늦은 귀가에도 가장 먼저 아침을 여는
온몸에 바퀴 자국 어지러운 젊은 가장이여
별은 왜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것일까.
우회를 꿈꾸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린
핸드폰 배터리마저 깜박대는 월릉교 부근
그리운 불빛 하나 둘 문을 걸어 잠근다.
군자교니 중랑천이니 하는 걸로 봐 시의 배경이 얼추 짐작되는데요. 전 국토가 도시화로 치닫는 지금, 문명에 지치기는 지방이라고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꿈은 속수무책으로 구겨져 잠의 바깥쪽에 버려지고, 스스로 인질로 잡힌 길의 정체는 도무지 풀릴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늦은 귀가에 이른 출근. '온몸에 바퀴 자국 어지러운 젊은 가장'의 모습은 그대로 한 시대의 자화상입니다. '끝은 보이지 않고 되돌아 갈 수도 없는', 그렇다고 어디다 냅다 팽개칠 수도 없는, 오오 하릴없는 길 위의 생존.
핸드폰 배터리마저 꺼져 버리면 영락없는 길 위의 미아가 됩니다. 백미러 속에 갇힌 하루. 눈을 감아야 별이 보인다는 인식은 전망 부재의 현실입니다. 그리운 지상의 불빛들이 하나 둘 문을 걸어 잠그는 시간. 우회를 꿈꾸지만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 것을.
박기섭(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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