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학기행] 7월이 되면 익어가는 청포도-이육사②

안동시내에서 이육사 문학관이 있는 원천리까지는 제법 먼 길이다. 구불구불 고개를 몇 개나 넘었다. 드디어 도착한 이육사 문학관. 생가에서 느낀 쓸쓸함과 안타까움이 완전히 사라질 만큼 우람한 문학관이 마련되어 있었다. 시인의 생가터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면서 산은 병풍처럼 두르고 청량산을 걸쳐 흘러내린 낙동강의 기세가 한숨 돌리며 유유히 흘러가고 그 곁의 넓은 들판이 바라다 보이는 곳, 거기에 이육사 문학관이 서 있었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월요일이어서 문학관은 굳게 자물쇠가 잠겨 있었다. 문학관 입구에 있는 전화번호로 연락해서 관리하시는 분과 통화를 하고 대구에서 학생들과 함께 왔다고 하면서 관람을 부탁했다. 고마우신 분이다. 오래지않아 오셔서 우리들만을 위해 문학관을 개방했다. 전시실은 2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에는 시인의 흉상과 육필 원고, 독립운동자료, 시집,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영상실과 세미나실, 기획전시실 등이 있다. 관리인 아저씨는 우리들을 위해 전시실 개방은 물론 이육사 관련 영상도 보여주었고 아이들과 어울려 이육사 시 탁본까지 함께 해 주셨다.

시의 순수성이 민족의 현실과 결합하여 예술로서 승화되는 것이 육사 시의 두드러진 장점이다. 그러기에 이육사의 시는 향토색 짙은 순수성과 함께 민족의 수난을 채색하여 끈질긴 민족의 염원을 시화한 양면성을 지닌다. 부단한 옥고와 고난으로 이어진 삶 가운데에서 오직 조국의 독립과 광복만을 염원한 육사는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내 골ㅅ방'에서 항시 쫓기고 있는 불안한 마음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빼앗긴 조국에 대한 망국민의 비애와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을 그의 시에 새겨놓았다.

문학관 옆을 돌아 뒤쪽으로 가면, 바위 위에 앉아 어딘가를 바라보는 듯한 동상이 있고 그 뒤로 시비가 있다. 정말 이육사가 생각하는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였을 게다. 강철로 되어 있지만 무지개처럼 사라질 것이라는 믿음의 뿌리에 이육사 문학과 삶의 본질이 있다. 시비 뒤편에는 청포도샘이라고 부르는 샘이 있는데 어디서 물을 끌어온 것인지 알 수는 없어도 물은 지치지 않고 흐른다. 샘을 돌아 문학관 뒤편으로 가면 '육우당(六友堂)'이 있다. 없어진 생가를 지금의 자리에 모형으로 만든 것이다. 육우당이라는 이름은 이원기, 육사, 원일, 원조, 원창, 원흥 6형제가 태어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전체적으로 '二'자 형태로 되어 있는데 시내에 있는 생가를 여기로 옮겨왔으면 더욱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시인의 묘소는 문학관에서 2.8km의 만만치 않은 산길이다. 일명 '청포도오솔길'. 힘들구나 하는 생각을 할 즈음 묘소에 도착했다. 문학관보다 높은 곳인 만큼 문학관에서 봤던 풍경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묘소에서 내려와 문학관 아래 생가터로 향했다. 생가터에는 이육사의 청포도 시비가 인물상과 함께 있다. 시인은 죽었지만 시인이 남겨놓은 시 속에서 다시 시인을 만난다. 비(碑)에 새겨진 인물상이 없어도 시인은 살아있고 청포도가 없는 지금의 고향이지만 청포도가 마치 눈앞에 아른거리듯 하는 것도 시(詩) 때문이다. 아이들과 함께 시를 낭송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영글고 있는 청포도가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힘든 여정이었던 만큼 오히려 아이들의 얼굴에는 뿌듯한 어떤 느낌으로 채워져 있다. 정말 '내가 바라는 손님'이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면 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고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하고 싶은 마음이다.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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