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의 북단으로 골이 깊고 산세가 수려하기로 유명한 문경 동로면. 면 소재지에서 국도를 따라 경천댐을 지나자마자 나타나는 첫동네 간송리. 동로면 간송리에는 참 젊은 이장이 마을일을 맡아보고 있다. 전국 최연소 이장인 하문상(29)씨.
아직도 한창 끼많을 20대의 이장이다. 그가 고향인 간송리로 돌아온 것은 4년 전. 구미전자고로 진학하면서 고향을 떠난 후 대학과 군복무를 마치고 안산 포항 등지에서 직장 생활을 한 지 10년 만이다. "어느날 도시생활이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길로 짐을 싸 귀향을 했지요."
간송리에는 천주와 간좌골, 불당골 등 3개 자연부락이 있다. 45가구 100여명이 오미자와 벼 사과 고추 콩 등을 생업으로 재배하며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는 곳이다. 여느 농촌과 마찬가지로 주민들의 평균 연령은 65세. 50대부터 80대까지가 주된 연령층이다.
간송리는 황장산 천주봉과 경천댐이 멋지게 어우러진 곳으로, 살림살이가 넉넉지는 않지만 주민들이 순박하고 인심이 넘쳐 언제가 정겨운 마을이다. 그 마을에서 하씨는 26세의 한창 나이에 이장직에 무투표 당선됐다.
"자꾸만 고령화되어 가는 마을에 젊은 피 수혈이 필요할 것 같아서 이장직을 지원했는데, 어르신들이 허락하셨지요." 하씨가 이장직을 맡고부터 정말 동네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하 이장은 농업 수익을 올리기 위해 문경시와 농업기술센터, 이장회의 등에 부지런히 뛰어다녔고, 쌀·밭 직불제 주민 보상과 관련해서도 꼼꼼히 업무를 챙겼다.
그는 이장으로서의 고유 업무 이외에도 동네일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주민들에게 필요한 종자가 있으면 인터넷으로 검색해 값싼 가격에 구입해 분양하고, 어르신들의 생필품이나 사료 등 장보기 심부름도 도맡았다. "과거 주민수가 수백명이 넘을 때는 시쳇말로 이장이 '끝발을 부렸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제는 이장이라는 직책이 심부름하는 봉사직에 다름아니지요."
하 이장은 특히 동제나 계절별 마을 잔치 또는 야유회 때는 찢어진 청바지에다 야구모자를 쓰고 어르신 앞에 나선다. 영락없는 신세대 이장이다. 막걸리라도 한잔 들이켜면 '립스틱 짙게 바르고'를 멋들어지게 한곡 뽑고는 어르신들의 춤과 노래에 맞쳐 율동까지 선사한다.
하 이장은 "예로부터 힘든 논밭 일에는 막걸리 한두 잔으로 허리를 펴고 노랫가락으로 시름을 달래곤 했다"며 "간송리 마을 어르신들도 흥이 참 많다"고 전했다. "젊은 이장이 타고난 끼를 발산할 때마다 마을 어르신들이 너무 좋아하십니다." 지난해 9월에는 추석특집 KBS전국노래자랑에 출연한 하 이장이 박현빈의 '곤드레 만드레'를 불러 인기상을 받자 동네 잔치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20대 젊은 이장에게는 현실적으로 난처한 일도 한두가지가 아니다. 삼촌뻘이고 친구 아버지가 대부분인 마을 주민들의 불화를 중재하기가 가장 어렵고, 타 지역 이장들과 교류행사 때에는 너무 젊은 탓에 악수를 청하기조차 부담스럽다는 것.
"마을을 방문하는 외지인이나 통계청 등 공무원들에게 이장이라고 소개하면 고개를 갸우뚱거리기 일쑤입니다. 어떤 행사에는 이장인줄은 차마 모르고 잔심부름을 시키는 경우도 종종 있다"며 껄껄 웃었다. 하 이장은 그러나 보람도 많다고 했다.
30년간 연락이 끊긴 아들이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자 대상에서 제외돼 끼니를 걱정하는 70대 할머니의 생계 문제를 해결했던 일, 농로 20m를 연결하지 못해 불편을 겪아왔던 마을의 숙원사업을 공사비 200만원을 확보해 해결했던 일 등.
"2년 전 수해를 당한 주민들에게 긴급 물자를 확보해 지원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중앙부처의 고위관료뿐 아니라 많은 재경 향우회원들이 잇따라 전화로 고마움을 전해왔을 때 이장으로서 정말 마음이 뿌뜻했습니다."
하지만 요즘 하 이장에게는 개인적인 고민이 생겼다. 그림 같은 전원주택을 지어 아내 공주(25)씨와 세살 난 수연이와 함께 재미있게 살고 있지만 귀향 당시의 사업계획이 좀 어긋나버린 것. 임야 장기 임대로 버섯과 산나물을 채취하고 경천댐에서 고기를 잡는 등으로 연간 3천만원가량의 수입을 올리고 있지만, 장기적인 고정 수익사업을 찾지 못한 것.
하 이장은 "테마형 농촌관광, 오미자농업 등 고부가가치 사업을 만들어내는 것이 최대 관심사"라며 "바쁘기는 하지만 고향마을과 어른들께 봉사하기 위해서라도 한참 동안은 이장직을 계속해야 할 것 같다"고 웃었다.
문경·박진홍기자 pjh@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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