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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사랑)할머니와 사는 예림·예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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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돌아온다던 아빠는 저 하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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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후의 찬, 걸인의 밥' 할머니는 "너희들이 다 클 때까지 내가 살아있어야 할텐데…"라며 단출한 밥상을 내놓지만 아이들은 함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군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나를 키우시느라 고생하신 어머니 같으신 우리 할머니 '감사합니다'라는 말 '사랑합니다'라는 말 그리 어렵지 않은데 할머니 앞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저 하나 때문에 힘들게 돈을 벌어 오셔서 예쁘게 저를 꾸며 주십니다. 할머니께서는 일을 하고 오셔서 힘들게 밥을 차려 주시고 나는 가만히 앉아 놀기만 하고. 나는 그때 내가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만 듭니다. 더 이상은 힘들지 않게 해드리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중간에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압니다. 저를 대학생 아니 어른될 때까지 키워주실 분입니다. 할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저는 할머니가 싫을 때가 있습니다. 또 할머니가 미워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지나간 일이니,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또 할머니께서도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저의 동생까지 돌봐주시고. 감사합니다, 제가 어른이 되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우리나라를 빛내는 것을 보실 수 있도록 저도 동생도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제가 어른이 되어 돈을 많이 벌어 할머니께 예쁜 옷도 사드리고 같이 여행도 하며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할머니 잘 모시고 살겠습니다. 할머니 오래오래 사시고 건강하세요. 할머니께 효도 많이 하겠습니다.'

33㎡ 남짓한 예림이(가명·13·여)의 집 안방. 어른 두 명이 나란히 누우면 적당할 크기의, 안방이라고 부르기엔 작은 방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액자에 담긴 글이다. 예림이가 할머니를 생각하며 2년 전 쓴 글은 어버이날을 위해 준비한 종이 카네이션과 나란히 놓여 있었다.

기자가 예림이의 글에 감탄을 연발하자 동생 예은(가명·10·여)이는 "저거 말고도 더 있어요"라며 책상을 뒤적여 쪼르르 다른 글도 가져왔다. 열두살짜리 아이가 쓴 글에는 현실에 대한 솔직함이 배어 있었지만 절망이나 자괴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언니를 자랑하겠다며 학교에서 받은 상장도 갖고 왔다. 두툼한 상장은 두 손으로 세기 모자랐다. 대부분은 글짓기로 받은 상이었다.

할머니 김정희(가명·64)씨가 집에 온 것은 오후 7시쯤이었다. 비정기적이지만 대구 남구 대명동의 액자 제작공장에서 허드렛일을 해 일당으로 2만2천원을 받는다는 김할머니. "애들이 점점 커가는데 돈 들어갈 일은 태산같잖아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라며 연방 무릎을 주물렀다.

김 할머니가 아이들과 함께 산 지도 7년. 예림이의 아빠인 막내아들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진 지 6년째다.

"주위에서 애들을 보육원에 보내거나 입양시키라는 말들을 했는데 웬걸요, 저런 꽃 같은 애들을 보낼 마음이 도저히 안 생기더라고요."

저세상으로 간 예림이 아빠는 대형차를 운전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오겠다'며 아이들과 약속하고 나선 2002년 12월 23일 아침을 아이들은 오롯이 기억하고 있었다. 예림이가 일곱살, 예은이가 다섯살 때다.

"금방 온다고 했었는데…." 안방 벽 높은 곳에 걸린 아빠의 사진을 보며 아이들의 말은 사위어갔다.

예림이 아빠가 예림이 엄마와 헤어진 지 1년 만에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의지할 곳을 잃은 할머니와 두 손녀는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언제까지 산다는 보장도 없고, 몸은 아파오고, 애들은 이렇게 밝고 착한데…." 아이들이 볼세라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김 할머니의 눈시울이 어느새 붉어져 있었다.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저희 이웃사랑 계좌는 069-05-024143-008 대구은행 (주)매일신문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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