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장이 자랑스러워서 웃는 것이 아닙니다. 내 가족, 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총알받이를 마다하지 않았던 전우들에게 54년이 지나서야 신세를 갚은 것 같아서 웃습니다. 다들 저 하늘 위에서 자랑스러워하겠지요?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이제는…."
군번 'K1119464' 제9보병사단 육군 하사 이상영(78)옹. 이옹은 4일 오후 중구 남산동 자신의 집에서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원래는 1954년 9월 30일 받아야 했지만 그간 사실 확인이 어려워 훈장 수여식이 무려 반세기 넘게 미뤄졌다.
501여단 선종률 여단장(대령)이 국방부장관을 대신해 훈장증과 훈장을 직접 전달했다. "귀하는 멸공전선에서 큰 어려움을 극복하고 헌신분투해 무공을 세우고…" 훈장증을 읊자 이옹은 눈시울을 붉혔다. 선 여단장은 "늦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이옹의 훈장은 1951년 6월 경기도 연천 전투에서 척후 임무 중 중공군 2명을 포로로 잡은 전공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옹은 이 사실을 잊고 살았지만 육군본부 인사처리과에서 참전용사들의 기록을 확인하면서 훈장 수여대상자임을 찾아냈다.
이옹의 참전은 여느 청년들과 비슷하다. 1950년 6월 경북 고령군 다산면 호춘2리에 살던 이옹의 가족들은 남침 소식에 부랴부랴 짐을 쌌다. 얽히고설킨 피난길에서 당시 19세의 청년이었던 이옹은 그만 가족들의 손을 놓쳤고 외톨이가 됐다. 그해 8월 대구의 한 소학교에서 자원입대했다. 군에서는 뭐라도 먹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반야월의 한 사과밭에서 일주일간 훈련을 받았다. 엎드리기, 기어가기, 총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미군 24사단 포병에 배치됐다.
"나이에 상관없이 척 보고 괜찮으면 모두 징집됐습니다. 팔을 쫙 펼친 것보다 더 긴 포를 짊어지고 이곳저곳을 뛰어다녔지요. 경주 전투, 포항 전투를 다 치렀어요."
이옹은 국군 9사단 29연대에 다시 배치됐다. 대관령을 하루에도 몇번씩 오르락내리락했다. 강원도 홍천에서는 포위당해 방호벽을 파고 스무날이나 숨어있었다. 어두워지면 마을로 내려가 밥을 주워 먹었다. 죽은 척 시체 위에 엎드려 있다 살아남기도 했다. 생사의 갈림길을 숱하게 넘나들었다.
"목숨이 하찮았지요. 방금 전 어머니가 보고싶다던 전우가 쓰러졌습니다. 뒤를 돌아보면 모두 시체들이었어요. 중공군이 새까맣게 밀고 올라오면 수류탄을 던지고 던져도 소용이 없었어요. 얼마나 무서웠던지…."
휴전 두달여 전인 1952년 5월 강원도 금화전투에서 이옹은 퍼붓는 포화 속에서 전우들을 잃었다. 그 역시 총알이 왼쪽 복숭아뼈와 오른쪽 발까지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고 그 때문에 지금도 절뚝거리며 걷는다. 부산의 한 육군병원에 후송됐다. 병상에 누운 그는 수소문 끝에 2년간 헤어진 가족과 극적으로 상봉할 수 있었다.
북한을 그토록 미워했던 참전 용사 이옹은 최근 북한 주민의 실상이 전해지자 "내 먹던 것까지 주고 싶더라"고 말했다. 훈장을 받은 오늘이 어머니의 제삿날이라며 사진 앞에 훈장을 선물했다.
"전우들아! 보고 있는가. 내 훈장이 아니라 우리들 훈장일세. 내 가슴에 단 것은 훈장이 아니라 바로 당신들일세. 고마우이. 이렇게 나라를 지켰고 살려줘서 고마우이." 허공을 바라보는 이옹의 눈이 촉촉히 젖어들었다.
서상현기자 ssang@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국민의힘, '보수의 심장' 대구서 장외투쟁 첫 시작하나
문형배 "선출권력 우위? 헌법 읽어보라…사법부 권한 존중해야"
장동혁 "尹 면회 신청했지만…구치소, 납득 못 할 이유로 불허"
이준석 "강유정 대변인, 진실 지우려 기록 조작…해임해야"
李 정부, '4년 연임 개헌·권력기관 개혁' 등 123大 국정과제 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