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조두진의 책속 인물 읽기]'칼에 지다' 요시무라 간이치로

용병으로 살다 죽어간 사람들

1860년대 일본, 260여년 유지되어 온 도쿠가와 막부는 급속히 흔들렸다. 천황이 거주하는 교토는 막부를 붕괴시키려는 '불온한 세력들'로 무법천지나 다름없었다. 교토로 숨어든 반막부파는 살인, 방화를 일삼았다. 반막부파는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천황의 깃발을 필요로 했다. (당시까지 일본은 막부가 천황을 옹립하는, 천황의 깃발을 든 쪽이었다. 정권을 잡으려면 일단 천황의 지원을 얻어야 했다. 그래야 국민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막부가 교토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것도 '천황의 깃발'을 지키기 위해서였고, 사쓰마와 초슈 중심의 반란군이 그토록 열심히 교토를 공략했던 것도 '천황의 깃발'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막부는 교토의 치안을 유지하고 사쓰마와 초슈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신센구미'를 조직했다. 떠돌이 무사들을 모아 급조한 조직으로 치안유지를 담당하는 무사집단이었다. 그들은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용병'들이었다. 말하자면 도쿠가와 막부가 정권과 치안 유지를 위해 비공식적으로 만든 조직이었고, 살인과 폭력을 자행하는 집단이었다. 칼을 든 집단이지만, 사무라이(자존과 품격을 지녔으며 특정한 가문에 속한)와는 달랐다. 신센구미는 칼잡이에 불과했다.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이름난 가문의 사무라이였다.

가뭄이 몇 해째 계속됐고 처자식을 먹여 살릴 수 없자 요시무라는 고향 난부를 떠나(탈번해) 신센구미에 자원 입대했다. 당시 탈번은 배신이었고 참수대상이었다. 남은 가족은 죄인처럼 지내야 했다. 그럼에도 요시무라가 탈번했던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여느 용병이 그렇듯 '더러운 임무'를 수행하는 신센구미의 월급 역시 상당했다. 요시무라는 돈을 벌기 위해 사람을 죽였고, 그렇게 번 돈을 한푼도 쓰지 않고 고향의 처자식에게 보냈다. 덕분에 처자식과 처자식이 얹혀 지내던 처가는 오랜 흉년에도 굶어죽지 않았다. 요시무라는 전투에서 죽는 날까지 돈을 벌었으며, 죽는 순간에도 자기 수중에 든 돈을 고향의 처자식에게 부쳐줄 것을 당부했다.

돈을 위해 일하는(싸우는) 용병의 죽음은 추모받지 못한다.

복거일의 소설 '애틋함의 로마'에서 마이키는 용병의 죽음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마이키는 하늘이 무너지던 날, 지구의 바탕이 도망치던 시간, 용병이라는 천직을 따라, 봉급을 받고 죽어갔다. 그가 묻힌 타이탄의 캐벌리 기지 교외의 용병 묘지는 초라하고 쓸쓸했다. 돌보는 이도 없는 듯했다. 하기야 돈을 받고 남의 싸움을 대신 해주려고 아득한 하늘을 건너온 용병들을 누가 오래 기리겠는가? 초라함과 쓸쓸함은 '용병 묘지'에 어울리는 것이다. 살아서 멸시 받은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사람들의 눈길을 벗어난 곳이 오히려 편히 쉴 곳인지도 모른다.'

대의명분을 좇아 살고 죽어간 지사와 오직 돈을 좇아 살다간 용병은 다르다. 지사는 춥고 가난한 세월을 살지라도, 그의 무덤 앞에 비석이 세워진다. 평화로운 세월이 찾아오면 철따라 국화꽃을 든 조문객이 찾아온다. 그러나 용병의 죽음 앞에는 모멸이 놓일 뿐이다. 남의 전쟁에 돈을 받고 참가한 사람의 주검 앞에 비석을 세우는 사람은 없다. 그 앞에 국화꽃을 놓는 사람도 없다. 무덤을 쓸어안고 눈물 흘려줄 사람도 없다. 남의 전쟁에 돈을 받고 참가해서 죽은 사람에게 남는 게 있다면 돈일 것이다.

나는 용병의 삶과 죽음이 저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가 자신이 펑펑 쓰기 위해 돈을 번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돈 그 자체가 목적인 사람이라면 제 목숨을 바쳐 돈을 벌지는 않았을 것이다. 목숨 바쳐 번 돈을 흥청망청 써 줄 제 몸뚱이가 없어지는데 돈이 무슨 소용인가. 그러니 용병의 '싸움'은 돈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다.

용병들이 돈을 받고 전쟁에 참가한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은 처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고 싶은 것이다. 아니면 돌보아야 할 노부모나 어린 동생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마이키처럼 '떠나보내야 할 연인'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전장에서 제 몸뚱이가 소모품으로 사그라질 때 용병들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무엇일까? 마지막 순간에 그가 그리워한 것은 무엇일까? 돈을 생각했다면 그 돈으로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자신이 죽은 뒤에 주어질 돈이 누구에게 전해지기를 바랐을까?

전투에 참가한 사람만이 용병은 아니다. 월급쟁이와 자영업자도 용병일 수 있다. (물론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지사도 있겠지만.) 나는 오직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사람을 저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오직 '노동' 그 자체가 좋아서, 돈벌이가 미치도록 좋아서,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일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책임을 다하는 아버지로 남고 싶은 것이다.

용병들은 태어나고 보니 싸움을 잘하고, 싸움이 체질에 맞아서 목숨 걸고 전장에 나가는 사람이 아니다. 굽실거리며, 모욕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참아내며 일하는 사람 역시 그것이 체질에 맞기 때문은 아니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사내답게 일어서는 사람은 '지사'로 불릴 자격이 있다. 지사와 달리 용병은 정의로운 사람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용병은 책임을 아는 사람이다. 용병의 삶을 택한 사람은 현실적 모멸을 가족에게 전가하는 대신 자신이 짊어진 사람이다.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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