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골든벨 울릴까, 말까…한턱 내고도 왠지 기분이 나빴다?

이명박 대통령의 '한턱 쏘기'가 인터넷에 최근 회자됐다. 한 인터넷 신문이 지난 9일 이 대통령이 TV에 출연해 '국민과의 대화'가 끝난 직후 여의도 한 호프집에서 참모진과 함께 맥주를 마신 뒤 '골든벨'을 울려 시민들에게 한턱 쐈다고 보도했고, 이에 대해 일부 네티즌들은 술값을 직접 냈다는 사람이 있다며 "한턱 쏜 것은 아니다"고 반박하고 나섰다. 일부 언론은 청와대 관계자에게 확인 취재 결과, 아는 사람을 만나 술값을 대신 낸 것은 맞다고 보도했다. 어찌 됐건 기분 좋았던 대통령이 맥주 한 잔을 산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한턱내라고 억지로 술집에 끌고간 것도 아니고 그저 당사자가 기분 좋아서 술값을 지불했다는 말이다. 초등학생부터 대통령까지 기분 좋으면 한턱 쏠 수 있다. 기쁜 일은 나눌수록 기쁨이 커진다고 했으니 흥이 많고 어울리기 좋아하는 우리 민족 정서상 '적당한 선'에서 잔칫상을 차려내듯 한턱낼 수도 있다. 하지만 자발적인 '한턱'이 아니라 벗겨먹기 수준이라면 어떨까? 물론 대통령에게 그렇게 했다는 말은 아니다. 도대체 왜 사야 하는지도 모르고 억지 춘향 격으로 끌려가 지갑이 탈탈 털리는 기분은 가히 좋을 리가 없다. 기껏 고생해서 상금 조금 받고 나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 연출되게 마련이다. 정말이지 기쁨도 없고 감동도 없는 '한턱 쏘기'가 돼 버린다.

◆벗겨먹기의 다양한 사례

최근 등장한 한 텔레비전 신용카드 광고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1등 하면 한턱 쏜다'고 담임 선생님이 방을 붙이자 정말 반 아이들이 1등을 해버렸고, 선생님은 기분 좋게 분식집에서 아이들에게 한턱 쏘면서 '다음에도 1등 해라'고 부탁하는 내용. 딴죽 걸기는 아니지만 자기 학급이 1등 했다고 해서 교사에게 득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는데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나 싶다. 하지만 세상을 그렇게 팍팍하게만 살 것은 아니어서 한번쯤 양보하고 '사기진작' 차원에서 마냥 예뻐 보이는 아이들에게 한턱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중학교 교사 정모(36)씨는 시험 성적이 발표될 때면 스트레스부터 받는다. 꼴찌할까봐 걱정해서가 아니라 1등할까봐 겁이 나서다. 처음에는 좋았다. 만년 꼴찌 반을 맡았던 적도 있었던 터라 첫 시험에서 자기 반이 1등을 하자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학년 회식자리에서 정씨는 20만원을 넘게 썼다. 1차로 전체 1학년 교사들이 다 모였고, 2차에는 남자 교사들끼리 소주 한 잔씩을 더 나눴다. 1학기에만 그러기를 두차례. "1등 하면 한턱내는 게 전통이라고 하지만 사실 많이 부담스럽네요. 기분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반 1등 하는데 누가 보태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대충 시험 치라고 할 수도 없고. 싸게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죠."

중소기업체를 운영하는 김모(42)씨. 얼마 전 한턱 쏘느라 적잖은 돈이 들었다. 평소 지인들과 어울려 골프를 즐기는 김씨는 지난달 홀인원을 했다. 골프채를 잡은 지 10년 만에 처음 홀인원을 한 그는 황홀하고 짜릿한 쾌감을 느꼈고 기꺼이 한턱을 내겠다고 했다. 홀인원을 기록한 그날, 담당 캐디에게 수십만원을 건넨 것을 시작으로 다음주 함께 라운딩을 했던 사람들과 평소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까지 8명을 불러모았다. 고급 한정식집에서 1차를 거하게 한 뒤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늦은 시간까지 홀인원을 축하했다. 물론 친구들은 수십만원씩 갹출해서 기념 트로피와 함께 순금 기념품까지 선물해주었다. 그렇다고 해도 식사비와 술값까지 김씨가 부담한 돈은 상당액에 이른다. 모인 사람들 중 홀인원을 해본 사람들은 저마다 한턱 쏘는 데 너무 많은 돈이 들었다고 푸념했지만 정작 자신들은 '벗겨먹기'가 아니라 당연한 축하라고 말했다. 구력 4년째인 이모(40)씨는 "월급쟁이는 자칫 홀인원 하고 나면 한달 월급이 날아갈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겁이 날 정도"라며 "홀인원 한턱내기가 얼마나 부담스러웠으면 '홀인원 보험'까지 등장했겠느냐?"고 했다.

◆한턱내고도 기분 나쁜 이유

한턱내기와 벗겨먹기가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이룬다면 그만큼 좋은 것도 없다. 자랑하고 싶고 축하받을 일이 생겨서 주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한턱 쏠 수도 있고, 그런 자랑을 들어주면서 기꺼운 마음으로 축하해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벗겨먹기라고 욕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서로 감정만 상하는 일도 다반사다. 기껏 쌈짓돈을 털어서 나름대로 정성껏 대접했더니 돌아오는 말이라고는 "고작 이 정도 하려고 사람 불러냈냐?"는 비아냥이거나 "그 돈 아껴서 부자 되겠다"는 악담이라면 차라리 한턱내지 않는 것이 나을 정도다. 물론 대놓고 이런 말을 하지는 않지만 이래저래 털어놓은 불만은 어떤 경로로든 귀에 들어오게 마련이다.

공무원 최모(45)씨는 "몇해 전 자체평가에서 1위를 해서 상금을 조금 탔는데 하도 한턱내라고 성화를 하는 바람에 술을 샀다가 본전도 못 건졌다"고 했다. 편한 마음으로 삼겹살을 샀지만 한참 뒤에 돌아온 뒷담화에는 "삼겹살이 질겨서 고생했다" "이왕이면 소고기로 살 것이지 그 돈 아껴서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냐?"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이 너무 얌체같다"는 원망만 들려왔다. 최씨는 "누가 퍼뜨린 말인지 알고 싶지도 않고, 안다고 한들 드러내놓고 싸울 수도 없는 노릇 아니냐"며 "난생 처음 돈 쓰고 후회했다"고 말했다.

40대 주부 류모씨. 홑벌이인데다 중고생 자녀가 있어서 살림이 빠듯한 형편이어서 자격증을 따기 위해 대학에 입학했다. 조만간 대학에 들어갈 아들 등록금도 준비해야 하고 이래저래 경기도 어려워서 장학금을 받고 싶었다. 밤잠 설쳐가며 공부를 해서 결국 과 수석을 차지했고 꿈에 그리던 장학금을 받게 됐다. 하지만 교수와 동료 학생들의 눈총 때문에 기쁨도 잠시. "남편이 꼬박꼬박 월급도 받아오는데 굳이 악바리처럼 장학금까지 받을 게 뭐 있냐?"며 눈총을 주고, "이왕이면 돈도 못 버는 후배 학생에게 장학금 혜택을 양보해라"는 등의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다. 결국 동료 학생들에게 몇 차례 술과 식사를 대접한 뒤에야 이런 뒷담화가 잦아들었다.

◆더치페이와 한턱내기

불경기에 누구나 주머니 사정이 빠듯하게 마련. 그러다 보니 웬만한 일이 아니고는 축하나 칭찬받을 일조차 입 밖에 내기를 꺼린다. 자칫 한턱내라고 각다귀처럼 달려들어 채근할까봐 두려워서다. 굳이 한턱이 아니더라도 함께 모이는 자리가 겁나는 사람도 있다. 기업체 중간 간부급들이다. 딱히 활동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후배들에게 회식비를 부담시키자니 체면이 서지 않고, 일정 비용을 거둬서 내자니 '무능력하다'며 뒤에서 욕할까봐 겁난다. 중견업체 부장인 최모(49)씨는 "가급적 부서 직원과의 회식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며 "10년 전만 해도 경기가 좋아서 부서 회의비도 따로 나오고, 거래업체에서 직원 회식비라며 조금씩 챙겨주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했다. 삼겹살이나 비교적 저렴한 횟집에서 회식을 해도 최소한 20만~30만원이 나오기 때문에 혼자서 부담하기에는 적잖은 액수. 때문에 최근 직장에서 회식비 조달도 더치페이로 바뀌고 있지만 대구에서는 아직 자리 잡기 힘든 실정.

이런 현상에 대해 대구대 사회학과 홍덕률 교수는 "한국인의 체면 중시와 집단주의 문화가 아직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집단 내에서 소속감과 인정을 받기 위한 수단 또는 그런 분위기가 확산됨으로써 '울며 겨자먹기식' 한턱내기가 성행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 성향으로 바뀌면서 '형편껏 베풀고 기꺼이 축하하는' 문화가 '쓰는 만큼 인정받고 치켜세워주는' 문화로 바뀌었다는 것.

성서공단 모 기업체 임원은 "회식비조차 내지 못하면 무능력한 상사로 낙인 찍는 문화가 여전히 팽배해있는 것 같다"며 "월급쟁이이기는 마찬가지인데 후배들 회식자리에 끌려다니다 보면 재정이 펑크날 지경이고, 결국 거래업체 쪽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털어놨다. 결국 직장에서 한턱 쏘는 문화는 부적절한 관계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건설업을 하는 조모(43)씨는 "한밤중에도 거래업체 등에서 전화가 걸려와서 갑작스레 '한잔하러 나오라'고 한다"며 "십중팔구 부서 회식을 하는데 한턱 쏠 사람이 필요하니까 와달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된다"고 했다. 행여 이런 전화를 받지 않거나 다른 일이 있다며 가기를 거부할 경우 알게 모르게 불이익이 돌아온다는 것. 조씨는 "한턱 좋아하다가 패가망신할 수도 있다"고 푸념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